아이들이 순수한 이유는 경험이 적어서 사소한 체험에도 쉽게 기뻐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이제는 어딜 가도 더 이상 '어린 사람'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 만큼 살아왔음에도 여전히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축복이라 해야 할까. 얼마 전 피아노 레슨을 받다 순도 백 퍼센트의 좋아하는 마음을 마주하고 두근거렸다. 틀려도 재밌고, 잘 하면 신나고, 남의 손에서 이뤄내는 음악만 듣다가 그들과 비스름한 음악을 스스로 만들어낸다는 게 기특하고.
궁금한 게 많아 새로운 취미에 몰두하느라 무기력을 잘 모른다, 고 선배가 그랬다. 사실 한창 의욕을 잃은 때에 그 말을 듣고 다시 피아노를 시작할 용기를 얻었다. 확실히 일상에 애정을 쏟는 대상이 생기니 매일에 활기가 생기더라. 피아노랑 한바탕 씨름하고 집으로 향하는 길. 왜 이만큼 진심을 다 해 피아노 앞에 앉는 것인지 골몰한다. 세상 물정 모르고 시간과 돈을 낭비한다고도, 생산성과 정 반대에 놓인 하등 쓸데없는 일이라고도 하는 비판 - 이라 적지만 내 귀엔 비난에 좀 더 가깝게 들렸다 - 을 듣는 불편함을 감내하면서 열과 성을 다 하는 건 단순한 호(好)의 마음이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 같은 표면적인 이유라기엔 감정의 심도가 깊다.
기억에 잔존하는 유년 시절 추억의 상당수가 피아노 학원과 닿아 있다. 매일 학원을 빠지지 않고 가던 아이. 장한나, 사라 장처럼 세계에 이름을 날리는 멋진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포부를 가진 당돌한 꼬마. 뭐든 찍어 먹어 봐야 직성이 풀려서, 엄마를 졸라 기어이 한 주에 두 번은 피아노 레슨이 끝난 후 바이올린 레슨도 받고 귀가하던 욕심 많은 딸. 바뀐 원장 선생님이 예뻐서, 예쁜 선생님이 플룻을 부는 게 너무 고와서, 바이올린을 대신해서 플룻을 배우고 싶다 조르던 철부지.
피아노 앞에 앉으면 여섯 살의 내가 된다. 피아노를 수려하게 연주하고 싶고, 그 재능으로 특별히 도드라져 인정과 관심을 갈구하고자 했던 어린아이로 피아노를 마주한다. 아이는 모를 거라 여기고 으레 건너뛰어버린 어른들의 행간을 읽은, 성숙한 어린이의 속상한 마음에게 지금에서야 차근히 설명하면 서운함이 누그러진다. 처음 보는 악보를 읽으며 버벅대는 내게 괜찮다 다독이고, 천천히 하면 언젠가는 될 거라고 안심시킨다. 손에 익지 않은 기교가 고군분투로 능숙해지면 그 누구보다 뛸 듯이 기뻐한다. 다시 피아노를 치는 건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는 일이다. 그때의 나를 돌보는 것이었다. 너무나 원했으나 아무도 주지 않았던 감정을 이제라도 채워주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좋았구나. 그 어느 때보다 순수할 수 있었구나.
지금보다 더, 아주 있는 힘껏 사랑하려 한다. 피아노는 곧 나의 어린시절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