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몇 가지 “그래”가 있는데 나 싫다는 놈에게 보내는 “꺼지라 그래.”, 평가질 하는 놈에게 보내는 “까라 그래.”, 내 것을 탐하는 놈에게 보내는 “먹고 떨어지라 그래.” 등등이 되시겠다.
내 뒷담화를 하고 다닌다는 선배도, 잘난 학생만 편애한다는 교수도, 나의 아웃풋을 인터셉트했던 상사도 “그래”들이 말끔히 해결해주었다. 누가 보더라도 을의 위치에서 살아온 주제에 내 인생엔 갑이 없었다.
남들과 다름없는 이유로 자녀계획을 세웠다. 원하던 시기에 아이가 찾아왔고 의학적으론 노산이라니 임신기간은 조심스러웠지만 행복했다. 남편은 아이를 나의 이름 끝자 ‘람’을 따서 제2의 람이란 의미로 “람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덕분에 태명은 쉽게 결정.
람투의 출산 전날까지도 내 일상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늘 일어나던 시간에 일어나 여유롭게 커피를 내려 마시고, 준비를 마친 출산가방을 체크했으며, 매일같이 하던 2시간의 운동을 해냈으며, 출산에 대한 두려움은 파워풀한 노래로 이겨냈다. 람투를 맞이할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출산은 순조롭던 임신과는 달랐다. 아이는 좀 크지만 머리 둘레가 길지 않고, 골반과 산모의 체력(?)이 좋아 수월할 것이라는 예상 덕에 선택한 자연분만.
예정일이 지나도록 아이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유도분만 당일, 의료진의 각종 노력에도 30시간 동안 아이는 내려올 기미조차 보이질 않아 결국 응급제왕으로 끝을 맺었다.
일시불, 할부 고통을 모두 겪었어도 람투를 만난다는 기쁨이 짙어 고통은 옅게 자리잡았다. 이 예상 밖의 출산조차 “그러라 그래.” 덕분에 나는 임출육 체질이 아닐까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람투 탄생 후 삼 일째 되던 날. 불타오르는 수술부위의 통증 때문에 몸을 추스리느라 정신 없던 그 시간, 신생아실에서 람투를 안고 헐레벌떡 간호사가 뛰어온다. 아이가 분유를 다 먹었는데도 울음을 안 그쳐서 젖을 물려야겠다고.
“젖이 돌았어야 애가 먹을텐데.”
간호사는 중얼거리며 한참 내 가슴 아니 젖을 살폈다. 살면서 가슴, 유방으로 불리던 내 신체기관이 “젖”이라고 불리는 것도, 프라이빗하지 않은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살펴지는 것도 분명 생소한 일. 하지만 나는 스스럼없이 젖을 물렸다.
‘역시 준비된 자에게 임출육의 고통은 짙지 않나니.’ 생각하며 아이가 젖을 빠는 모습을 분명 행복하게 바라보았는데 마음 한 구석, 도통 정체모를 위화감이 느껴지는 거다. 그리고 천국이라는 조리원을 퇴소한 뒤 단 하루가 지나자마자 그 정체를 알게 됨.
이건 갑의 탄생이다. 먹거나 자는 일에 허락이 필요함은 물론, 함부로 아프거나 나태해질 수 없게 하시는 갑오브갑이 내 인생에 출현한 거다.
수유를 할 때면 갑님이 부디 잘 먹어주십사 머리를 조아리고, 트림을 하지 않으면 혹시나 배앓이를 할까봐 발을 동동거렸다. 갑님의 밥상에 불결함이 묻을까, 젖병들을 열탕소독하고, 2시간 단위로 식사를 올려야 갑님의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밤만 되면 제발 주무시길 바라며 그 분을 안고 남편과 쉬쉬~ 거리며 좀비처럼 집 안을 맴돌아야 했다.
나를 보호해주던 그래들은 그분 앞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분 앞에서 “안 먹을 거면 말라 그래.” 라든지 “자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 그래.” 따위를 말할 수 있을까.
자발적으로 지금까지의 나를 뒤흔드는 을오브을의 위치를 선택한 삶. 자녀를 계획하며 그 많은 준비를 하고도 이것이 부모되기의 첫 단계라는 걸 이제서야 알았다. 나 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물론 책임감 있는) 엄빠가 이런 불공정거래를 했다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을오브을의 삶이 주는 행복을 기록해보려한다. 물론 이 모든 건 갑님의 컨펌이 있어야 가능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