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봄 한진해운 사보에 올렸던 글입니다
바나나 리퍼블릭
미국- 유럽의 경제충돌
2012년 11월8일, WTO 홈페이지에는 2차대전 이후 가장 길게 이어진 다자간 무역분쟁이 종결되었다는 뉴스가 올라왔습니다. 무려 20년동안 지속된 EU-중남미10개국 바나나 수입관세협정이 100여 차례가 넘는 다자간 협상을 통해 2009년 11월협정문이 만들어 집니다. 모든 관련당사국의 비준이 이루어짐으로 종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1993년 유럽연합은 중남미산 바나나에 대해 수입을 제한하고, 유럽연합의 옛 식민지 국가들에 대해서는 특혜를 인정하는 규칙을 시행했습니다. 20세기초까지 영국 식민지였던 캐리비안 지역의 자메이카, 도미니카, 세인트 루시아등과 프랑스 식민지였던 서아프리카 국가들, 코트디부아르, 카메룬등에서 수입되는 바나나에 대한 우대조항입니다. 그런데… 이 특혜관세제도에 대해서 미국이 발끈하며 WTO에 제소를 하고, 우리에게도 낯익은 슈퍼301조 (97년 한국산 자동차에 대해서 제기했던 보복관세 조항)를 들이대며, 1999년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수입되는 캐시미어, 치즈등 유럽산 9개 제품에 대해서 보복관세 조치를 취했습니다.
조금 의아한 상황입니다. 도대체 왜? 유럽연합이 중남미산 바나나에 대해서 수입관세를 부과한 것에 대해서, 열대과일 바나나를 생산도 수출도 하지 않는 미국이 발끈하며 EU와 무역전쟁을 시작했을까요?
WTO 정신을 위배하는 유럽연합 행위에 분노를 느낀, 자유무역 수호자 미국의 가차없는 응징이었을까?
선악과
성경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에덴동산의 모든 과일은 자유로이 먹되, “선과악”을 알게 해주는 나무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성인남자의 목에 뚜렷이 증거가 남아 있기에, 명칭까지 Adam’s Apple인 것을 보면, 선악과가 사과라는 것은 별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와그리스어 구약성경에서는 선악과를 사과라고 명시한 내용은 없었다고 합니다. 선악과와 사과가 동일시 되기 시작한것은, 성경이 라틴어로 옮겨지면서 입니다. “선악”이라는 뜻의 라틴어 “Malum”이 쓰이고, “Malum”은 사과라는 뜻도 있었습니다. 후대 르네상스 시절 필사본 성경이 늘어날 때,일부 사제들이 별 의심 없이 Malum을 선악과 대신 사과라고 옮겨 적었던 것이 유래라고 합니다. “뉴턴의 사과”, “윌리엄텔의 사과”에서 보듯이, 유럽에서 가장 흔하게 보이는 과일나무가 사과였기에 그 상황이 자연스럽기도 합니다.결정적으로 구텐베르그의 금속활자가 발명된 이후 대량 보급된 성경과, 성경내용을 바탕으로“존 밀턴”이 쓴 서사시 “실락원”에서 선악과를 사과로 표현하면서, 이후 자연스레 사과는 선악과와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사과라고 단정하기에는 아귀가 잘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먼저, 에덴동산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중동지역은 사과가 거의 자라지 않는 지역입니다. 다음으로, 금단의 과일을 먹음으로서 아담과 이브는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무화과 잎으로 중요 부위를 가리게되었습니다만…
부끄러움을 가리기에는 사과잎은 물론, 무화과잎도 영 시원치 않습니다.
* Adam and Eve, Durer作, 1507 - Wikipedia
혹시… 다른 과일이었을까요?
구약성서를 공유하는 이슬람교의 경전 코란에서는 이 선악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길게 드리운 그늘 아래 열매가 층층이 쌓이면서 열리고, 제철이 딱히 없이 사시사철 열매가 열린다”.이 묘사대로라면 더더욱 사과는 아닌 것 같습니다. 길게 드리운 그늘을 만들 정도면,충분히 몸을 가리고도 남는 크기의 잎이 있는 나무입니다. 몇년전 SBS에서 제작한 “최후의 제국”이라는 다큐를보면, 솔로몬 제도의 망망 대해 속에 홀로 떠있는 자급자족의 섬 “아누타”에서는 지금도 바나나 잎을 이용해서 옷을 해 입고, 밧줄, 침구도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굳이 선악과가 어떤 과일이었을까? 따져보자면...,에덴동산에서 이브가 먹었던 과일은 훨씬 더 유혹적인(?) 바나나가 아니었을까요?(물론, 달을 가리키고 있는데, 보라는 달은안보고 왜 손가락 끝은 보면서 왈가왈부 하고 있냐고 반문할수도 있겠습니다)
그로미셸과 파나마병
바나나는 인간이 재배한 식물 중 가장 오래된 작물 중 하나로 대략 7000년전부터 재배를 시작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바나나 덕분에 수렵채집생활에서 정착생활로 변경 가능했습니다.바나나는 뿌리에 줄기가 있어, 이 뿌리 줄기가 뻗어 나가면서 번식이 되는 무성생식작물입니다. 따라서, 별도의 생식과정(씨)이 없이 뿌리를 잘라서 옮겨 심기만 하면 되는, 재배가아주 간편한 작물입니다.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 졌으니, 이 역시 바나나 번식과정과 차이가 없습니다. 지금도 바나나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고 소비하는 과일이며, 곡물까지 포함해도 밀, 쌀,옥수수 바로 다음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천종이 넘는 야생종 바나나가 있지만,상업적으로 재배 하고 있는 바나나는 “캐번디시(Cavendish)”라는 한 품종입니다. 현재 미국에서 먹는 바나나, 유럽에서먹는 바나나, 그리고 한국에서 먹고 있는 바나나의 맛과 모양이 다 똑같은 이유입니다.
하지만, 1950년대 까지만 해도,미국, 유럽사람들이 먹던 바나나는, 어찌 보면 외설적(?)인 이름의 “그로미셸(Gros Michel)”이 유일했습니다. 영어로 “Big Mike”입니다.캐번디시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했습니다. 크기도 더 크고, 껍질도 더 두꺼워서 운송보관이 쉬웠으며, 질감과 맛도 훨씬 더 진하고 풍부했습니다만,어느 순간 식품매장에서 사라집니다. '파나마병'이라는 바나나 마름병이 번지면서 중미/캐러비안 지역에서 자라던 “그로미셸”이 전멸합니다.
생식과정을 거치지 않고 복재로 재배하는 바나나는 전부 똑같다는 말이고, 한 개만 병에 걸려도 전부 같은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 병이 발견된 파나마에서 인접국가로 번지면서1960년대 초 그로미셸은 사실상 멸종되었습니다. 바나나 업계가 공멸할 뻔했던 위기에서“캐번디시”가 구원투수로 등장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또 다른 마름병이 캐번디시를 덮친다면…?
수많은 생명공학 연구소에서 끊임없이 맛도 좋고, 대량재배에도 용이하며,적당한 시기에 숙성될 수 있는 새로운 바나나 개량종 연구를 하고 있지만, 씨가 없는 즉 번식능력이 없는 바나나는 육종가에게는 “미션 임파서블”입니다. 종자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교배해서 새로운 종을 만드는 과정을 거치는데,바나나에서 씨를 찾을 확률은 1만분의 1이라고합니다. 파나마병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신종개발이 시작되었지만, 1900년대초 40년동안 신종 개발 성공율이 0%…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에 비견할 정도로 힘든 일입니다. 당장의 대안이 없는 바나나 업계는 새로운 마름병 출현을 막기위해서, 드넓은 바나나 농장에 경비행기를 이용해서 대략 4-5일에 한번꼴로 살충제를 들이 붇고 있습니다. 수확된 바나나는 물에 행군 후에 포장됩니다만, 이때 헹구는 물에는 장기간 운송을 고려 성장 억제제가 풀어집니다. 소비하는 나라에 도착한 다음에는 빨리 익히기 위해 카바이트라는 탄화칼슘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렇게만 보면, 바나나를 마구 먹어도 될지 고민됩니다만..)
사진출처: business.inquire.net
신비로운 열대의상징
1800년대는 산업혁명의 세기이자 운송혁명을 가져온 철도의 시대였습니다.
철로가 건설된다는 것은 몸속에 핏줄이 퍼져나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도시와 도시가 연결되고, 엄청난 물량과 사람들이 이동하게 되면서 수 천년간 기껏해야 소,말등 축력에 의존한 수레 운송시스템과는 소위 “차원”이 다른 운송수단의 대변혁이 일어 나게 됩니다. 영국에서 시작되어, 유럽대륙,미국을 거쳐, 중남미에도 철도건설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1871년 코스타리카 정부는 미국의 사업가 “헨리 메익스”와 손잡고 산호세 – 포트리몬간(캐러비안쪽 항구) 철로 건설을 시작합니다. 헨리 메익스는 유럽 금융권으로부터 자본을 조달하고, 휴스턴 지역에서 목축업으로 성공한 조카 “마이너 키스”를 총 건설책임자로 불러옵니다. 무덥고 습한 열대의 기후, 들끓는 모기떼… 어렵게 건설한 철로를 한 순간에 쓸어 버리는 장대비는 가장 큰 적입니다.1882년, 산호세까지 50km를 남기고 코스타리카정부는 파산을 하고, 메익스도 사망했고, 철도 건설은 중단됩니다. “키스”는 새로운 정부와 재협상을 벌여, 정부의 비용부담 없이 철로 건설을 하는 대신 99년간 철도사업권 및 철로 인근부지 무상이용권, 리몬항 무상이용권등을 약속받고, 영국으로 건너가 1200만 파운드(현재시세로 약 2억불) 투자를 얻어옵니다.
건설 재개에 앞서, 키스는 철길 주변에 인부들을 먹이기 위한 목적으로 바나나 재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과일을 미국으로 가져가 판매할 수 있다는 것 깨닫습니다. 1890년 산호세-리몬간 철도가 완공된 후, 키스는 이미 큰 수익을 안겨주고 있던 바나나 재배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됩니다. 철로 주변에 심은 “키스의 바나나”는 미 남부지역 바나나 시장을 장악하면서 철도 수익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이익을 안깁니다. 키스는 인근 중미국가들 철도건설을 계속하면서, 과테말라, 온두라스, 니카라과, 파나마, 콜롬비아, 에콰도르에 바나나 농장을 확장합니다. “키스”는 리오그란데 강 이남 가장 부유한 미국인으로 등극합니다.
*적재 대기중인 바나나, 1920년대 코스타리카철로변 - 구글 이미지
1876년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미국독립 100주년 기념 만국 박람회가 열렸습니다. 이 박람회장에는 그레이엄벨의 전화기와 샤프펜슬등 수많은신상품이 진열되었습니다. 한구석에는 이국의 향과 맛을 지닌 바나나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자메이카로부터 갓 도입되기 시작한 생소한 과일은 신비로운 열대지역에 대한 구체적이고 생생한 상징이었고, “캐비아” 처럼 사치스러운 음식이었기에, 과시적으로 소비되고있었습니다.
1885년 이 과일의 수입과 유통을 위한 회사(Boston Fruit)가 미 동부에 설립되었습니다. 이 신출내기 회사는 범선을 버리고 증기선을 도입했지만,여전히 긴 항해날짜로 바나나가 보스턴에 도착했을 때 상당수는 썩어 있었습니다. 세계최초로 혁신적인 냉장 운송을 시작하고, 항구에는 냉장보관창고를 지었습니다. 당시의 냉각시설은 아직 냉각기와 압축가스를 이용하기 이전으로, 엄청난 양의 얼음덩어리를 이용한원시적이고 단순한 방식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출발할때는 열대지방을 경험하고픈 관광객을 태우고,돌아올때는 바나나를 가득 선적해 오면서, 보스턴 프루트는 성장을 계속합니다.
녹색교황UFC
1899년 자메이카에서 바나나를 수입해서 미동부에 판매하던 BostonFruit와 중미국가에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을 건설한 “키스”의 회사가 합병하면서 “UFC(United Fruit Company)”를 출범시킵니다. 바나나는 금방 사과를 넘어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는 과일이 되었습니다. 사과산지는 미국 대부분 도시에서 몇 시간 이내에 위치한 반면, 바나나는 운송거리가 수천km에 달하는 썩기 쉬운 열대과일 이었슴에도…
쉽게 상하는 바나나의 운송과 유통은 시간이 관건입니다. 긴 운송유통 과정 동안 바나나의 숙성을 조절하고, 지연시키는 방법을 찾아내야 했습니다. 숙성지연을 위해 처음으로 CA저장법을 이용했습니다. (공기중 이산화탄소와 산소의 비중을 조절해 과일의 신선도를 최상으로 유지) 이 기술은 바나나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더 빠른 바나나 선적작업이 가능하도록 항구시설을 업그레이드 하였습니다. 항구에 들어오는 화물선과 농장의 교신이 가능하도록 라디오 통신망을 설치하였습니다.
UFC는 바나나 생산과 운송을 위한 선박, 철도,창고, 통신, 항만뿐 아니라,교회, 은행, 철강, 세탁소 까지 망라하는 거의 모든 사업체를 바나나 공화국에 운영합니다. 정글로 뒤덮힌 열대의땅을 계속 밀어버리며 새로운 경작지를 늘려갔습니다. 인구의 대다수가 “카톨릭”인 중미에서 교황의 권위가 절대적인 것을 빗대어, 정치, 경제, 사회를 지배하는 UFC를 “녹색교황”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처음으로 “엘 풀포, El Pulpo”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엘 풀포”는 스페인어로 “문어”입니다. “문어발 경영”이란 표현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UFC는 계속적으로 바나나 생산지역을 넓히며, 미국/유럽인의 식탁에 값싸고, 먹기 좋고, 영양가 많은 바나나를 공급합니다. 1929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대공황 시기, 사과 노정상들도 값싼 바나나를 먹으며 배고픔을 해결했습니다.
Banana Republic
“Gap” 의류의 한단계 윗 브랜드인 “Banana Republic”라는 유명 미국 패션 브랜드가 있습니다. 많은 나라에서 중저가로 팔리고 있는 SPA 브랜드입니다. 하지만, 제가 2000년대 한참을 살던 브라질에서는 오랫동안 공항면세점에서만 구입할수 있었던 옷으로, 한때 명품(?)대우 까지 받기도 했습니다. 90년대 중반까지도 한국에서 꽤 많은 제품이 생산되면서,이태원 시장에서 로스제품 T셔츠들을 제법 사입기도 했었습니다. 당시 한국에는 매장이 없었기에, 미국물 좀 먹었다는 친구들만 입고 다니던 옷입니다. 등에 카리브해 지도가 고색창연하게 프린팅 되어 있는 흰 면티 하나만 걸쳐도 요즘과는 다르게 제법 먹어줬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Banana Republic”은 “UFC등 바나나 기업과 미국정부”에 순종적으로 따르는 나라들을 뭉뚱그려 지칭하는 것으로 “바나나 생산 이외에는 전혀 존재감이 없는 나라”라는 비하의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마지막 잎새”, “크리스마스 선물”등을 쓴, 가장 대표적인 미국의 단편소설작가 “오 헨리”가 처음 등장시킨 표현입니다. 우체국에 근무하던 중 횡령혐의를 받고 “온두라스”로 달아나서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양배추와 임금님”이라는 단편소설집에서 처음 사용했습니다. 지금도 과테말라,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에콰도르등 대표적인 바나나 수출국들을 통칭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출처 : generalebooks.com
매카시즘과 혁명
1950년 대표적인 바나나 공화국인 과테말라에서는 38세의 젊은 전직 대위 “아르벤스”가 대통령으로 취임합니다.열정적인 신임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반식민경제의 종속국가에서 경제적 독립국가”로 과테말라를 전환시키겠다고 사자후를 토합니다. 당시 경작이 가능한 과테말라 면적 중70%는 UFC소유였고, 이면적의3/4는 휴경지였습니다. 아르벤스는 UFC에게바나나 수출세 납부, 점유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할 것, 과테말라 국내법을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1952년 결국 바나나기업이 사용하지 않고 있던 휴경지를 공시지가로 몰수해서 10만 농민에게 분배합니다. 감히 “녹색교황”에게 선전포고를 했던 것입니다.
당시 미국은 중세유럽의 마녀사냥과 비견될 법한 “매카시즘” 광풍이 불고 있었습니다. 공화당 상원의원이던“매카시”가 경력위조, 금품수수,음주추태등으로 정치생명이 위태한 상황에 처했을때입니다. 그는 1950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미국사회에서 활동중인 공산주의자 297명 명단을 가지고 있다고 폭탄발언을 합니다. 아무런 증거도 내놓지 못하는 무차별 폭로 였지만, 당장 신문 한 부를 더 파는 것이 중요했던 미국언론은 그의 폭로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매카시 발언이 대중의 관심을 끌자 공화당은 이를 적극 활용해 친민주당 인사들을 엮어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민주당은 자신들이 공산주의와 상관없음을 증명하기위해 매카시의 마녀사냥에 더 앞장 섰읍니다. 정치인, 공무원,영화배우, 경제학자, 직장인 수백명이 투옥되었고,수만명이 조사를 받습니다. 조사만 받은 것이 알려져도 직장에서 해고가 되었습니다. 당시 유명 경제학 교과서 저자이자, 케인즈 경제학 대가인 “폴 새뮤엘슨”도 공격을 받으면서, 1929년 세계대공황을 극복하고 미국의 성장을 이끈 케인즈주의 경제학이 급격히 위축되면서 몰락합니다. 이후 시카고 학파가 이끄는신자유주의 경제학이 득세하고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매카시즘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기에, 중미 작은 나라의 급진정책에 공산주의 딱지를 붙이기는 별로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아르벤스와 공산주의간 실제 연관성은 오랜 논란이 있습니다) 당시 미국 국무장관인 델러스는 UFC 뉴욕 법율사무소의 파트너 였으며, 델러스의 형 앨런은 CIA 국장이자 전직 UFC 이사였습니다. UFC의 PR담당자인 휘트먼의 부인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비서였습니다. 결국 반군 쿠테타로 쫒겨난 아르벤스는 망명객으로 멕시코, 쿠바등을 떠돌다가, 95년 사후에 조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녹색 교황에게 유일무이하게 저항했던 이 소국의 지도자는 과테말라의 링컨,과테말라의 케네디로 불리고 있습니다.
“아르벤스”가 실각할 당시, 여행을 하면서 과테말라의한 병원에서 무료봉사를 하고, 종교물품을 팔며 생활하던 26살의 의대졸업생은 이런 글을 남깁니다. “미국이 쳐들어 왔을때, 나는UFC장사꾼에 맞서 싸울 생각으로 내 또래 젊은이들을 모으려 했다. 과테말라에는 싸움이 필요했으나, 싸우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저항이 필요했으나, 저항하려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 청년은 몇년 후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로 건너가 혁명을 성공시킨 “체 게바라” 입니다. 쿠바 혁명정부를 몰아내기 위해 미국은 “피그스만 침공” 전쟁을 일으키지만, 완패합니다. 혁명 전 쿠바는UFC 주요 바나나 산지 중 한 곳이었으며, 피그스만 침공시 UFC소유 선박이 이용되었습니다. 4년 동안 뚜렷한 증거도 없이 미국을 뒤흔든 매카시즘은 사회 전반에 극도의 피로감을 쌓았고, 결국 1954년 미상원은 매카시를 불신임 투표로 해임합니다. 3년 후, 매카시는 48살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사인은 알코올중독으로 인한 급성간염 이었습니다.
*혁명성공직후 하바나 시내를 걷고 있는 체 게바라-wikipedia
스탠다드 푸르트의기회와 혁신
달도 차면 기울고, 비대하게 커진 공룡은 스스로의 무게에 휘청거립니다. 들불처럼 번지는 파나나병에 대한 대책으로 UFC는 계속적으로 새로운 땅을 확보하려 했지만, 이미 바나나 공화국들은 UFC를 두려워 하면서도 증오하기 시작합니다. 쿠바에서 일어난 혁명이 주변국으로 옮겨갈 것을 걱정한 미국정부까지 UFC에 복잡한 심기를 품기 시작합니다. 미국정부는UFC에 독점금지소송을 제기합니다. 결국, 바나나 공화국에 있는 철도망과, 미사용 토지, 미국내 슈퍼 유통망을 처분합니다. 점점 수익이 감소하면서, 파나마병에 발빠르게 대처한 “스탠다드 프루트(Standard Fruit)”가 제왕의 자리를 넘보게 됩니다. 경쟁자를 허용하지 않는 UFC의 방식에 따라 이런저런 경쟁자들은 UFC에 흡수되거나 망할 수 밖에 없었지만, 바나나 운반선에 공급하는 얼음공장으로 시작한 “스탠다드 푸루트”는 수 십년간 미국 바나나2위 수입업체로 살아남습니다. 꾸준히 10~20%정도의 시장을 점유합니다.
흔치않지만, 큰 차이의 2위 기업이 1위 기업을 따라잡는 경우는, 엄청난 경제위기가 발생될 때, 그 시장의 판이 완전히 바뀌는 시기에 일어납니다. 파나마병이 점점 번져갔지만, 변화에 둔감해진 공룡 UFC는 새로운 경작지로 계속 옮겨 심는 소극적인 방법만을 고수합니다. 반면, 스탠다드 푸르트는 더 이상 옮겨 심을 수 있는 경작지가 없어 회사가 곧 망할 위기에 처했기에, 1950년대부터 적극적으로 “그로미셸” 대체종을 시장에 내놓습니다.그렇지만, 신품종은 허리케인에 약해서 재배가 어렵다거나, 운송 중 온도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해서 쉬 상한다거나, 또는 맛이 현격히 떨어지는 등 딱 맞는 대체종은 없었습니다. 유력한 대체후보 “캐번디쉬”는 그로미셸을 파괴시킨 전염병에 강했고, 맛도 만족스러웠습니다. 다만, 캐번디시는 그로미셸이 갖고 있는 딱딱한 껍질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로미셸은 다발채로 화물칸에 내동이 쳐도 끄떡없는 딱딱한 껍질이 있었습니다. “스탠다드 푸르트”는 별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캐번디시”를 밀면서 더 좋은 운송법을 개발해야 했습니다. 카네기대 역사학과 교수인 “존 솔룰리”가 “바나나 업계 사상 가장 위대한 혁신”으로 평가한 스탠다드의 해결책은…
바나나를 선체 바닥에 바로 선적하는 것이 아니라, 상자에 담아 운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별 것도 아닌듯 한, 기껏 포장상자를 도입한 덕분에 수출용 바나나의 생산과 마케팅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바나나를 상자에 담기 위해, 농장에 포장시설을 만듭니다. 이제는 바나나 박스를 트럭에 실어 항구까지 직접 운반하는것이 훨씬 효율적입니다. 이렇게 되자, UFC가 바나나 재배와 더불어 건설했던 중미 각국의 철도시대가 저물기 시작합니다. 상자포장은 뜻밖의 효과를 낳았습니다. 바나나가 담긴 상자채로 도매상을 거쳐, 청과물 가게 진열대까지 도착합니다. 상자에 상표를 붙이기 시작합니다. 상자에 담기 전 낱개마다 앙증맞은 스티커까지 붙입니다.결국, UFC도 스탠다드 푸르트의 포장방식을 쫓아가고, 캐번디시를 도입합니다. 그로미셸은 1965년 이후 미국에서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추락 그리고 새로운시작
녹색 교황 UFC의 사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하면서,1969년 “리만브라더스”에서 경력을 쌓은 월가의 인수왕 “엘 블랙”이 텍사스 석유탐사 업체인 “자파타사”와의 치열한 경쟁끝에 UFC를 인수합니다.당시 자파타사의 사장은 후에 대통령이 된 “아버지 조지 부시”였습니다. “엘 블랙”은 회사명을 “UnitedBrand”로 변경하고, 소녀라는 뜻의 “치키타”상표를 붙입니다.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는 양키 브랜드의 이미지를 바꾸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었습니다. 손실은 계속 늘었고, 정부와의 독점금지소송은 이어졌습니다. 정부 압력에 쫓겨 과테말라, 코스타리카 농장을 델몬트에게 매각합니다. 74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중미국가들이 연합해서 상자당 1불, 바나나 수출세를 부과를 선언합니다. 회사의 상황은 점점 악화 되었습니다. 치열한 경쟁끝에 인수한 회사가 오히려 부담이 되면서, 심하면 원래 회사까지 망해버리는 “승자의 저주”.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69년 뉴욕증권거래소 역사상 하루거래로는 3번째로 큰 규모라는 치열한 승부끝에 회사를 인수하고, 이 공룡기업을 이끌었던 “엘 블랙”은 1975년, 44층 자신의 맨하튼 사무실에서 뛰어내립니다.
과거의 악명을 씻고, 친근한 기업 이미지를 주기위해 UFC는 “치키타(Chiquita)로, 스탠다드 푸르트는 “돌(Dole)”로 변경합니다. 지금도 전세계 상업용 바나나의 85%는“치키타”, “돌”, “델몬트”등 5대 바나나 메이져에 의해 생산됩니다. 이회사들이 생산한 중미산 바나나의 상당량은 그들이 직접 운항하는 냉동전용선박을 통해 북미, 유럽으로 운송되고 있습니다.유럽은 전세계에서 교역되는 바나나의 거의 절반을 소비하는 바나나 최대시장입니다. 미국이 소비하는 양의 세배입니다.
* 출처 : jigidi.com
바나나 전쟁
93년 유럽연합은 과거 제국주의시대 그들의 식민지였던 ACP(Africa, Caribbean, Pacific)국가들에 대한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지속 유지하기 위해서, 이 국가들의 주요 수출품인 바나나에 대한 일정 수입물량을 보장하는 특혜를 주고,반대로 중남미산 바나나에 대해서는 수입관세를 부과합니다. 이 조치는 중미에서 바나나를생산하는 “치키타”, “돌”, “델몬트”등 3대 미국 바나나기업 수익에 직격탄을 날렸습니다.치키타 회장인 린드너는 미국 공화, 민주 양당을 대상으로 전방위 로비를 펼칩니다.당시 야당인 공화당 원내총무인 “밥 돌” 상원의원은미국정부가 직접 나서서 유럽연합의 부당한 처사에 맞서라고 촉구하고, 결국 94년 미국 무역대표부 “미키켄터” 대표는 슈퍼301조에 따른 유럽의 불공정 무역관행 심사를 시작했습니다. 바나나 업체들의 로비는꾸준히 지속되었고 98년 미키켄터 대표는 유럽에 대해 보복관세 5억2천만불을 물리겠다고 발표합니다. 99년 WTO에서 미국손을 들어주고, 미국은 영국산 케시미어, 프랑스산 치즈등9개품목에 보복관세를 부과합니다. 이후, 미국과유럽은 중남미 10개 바나나 생산국까지 포함된 다자간 협상을 100회이상진행한 후, 2009년 최종합의서를 작성합니다. 중남미산 바나나에 대한관세를 단계적으로 축소하면서, 톤당 176 유로 수입관세를2017년까지 114유로로 변경하기로 합니다. 이 합의서는 2012년 11월 모든 관련당사국이 비준함으로써유효하게 되었고, 이로서 20여년에 걸친 WTO 최장 무역분쟁인 바나나전쟁은 끝이 납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에게도 제일 만만한 과일이 되어버렸지만..
앞으로는 노랗게 잘 익은 바나나가 예사로 보이지 않을겁니다.
참고 : 역지사지 미국사 (대너 린더만 저 / 박거용 역)
바나나 세계를 바꾼 과일의 운명 ( 댄 쾌펠 저 / 김세진 역)
과일 사냥꾼 ( 아담리스 저 / 김선영 역)
체 게바라(장코르미에 저 / 김미선 역)
나쁜사마리아인들 (장하준)
경제학카페 (유시민)
Historic signingends 20 years EU-Latin banana disputes (WTO news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