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양미술 순례기
재일조선인 서경식은 빼어난 에세이스트로 이름이 나기 전, 비전향 장기수 서준식과 서승의 동생으로 더 유명했다. 정부에 의해 조작된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의 주모자로 1971년 잡혀 수감된 후 서준식은 1988년, 서승은 1990년에 출소했다. 모진 고문 탓에 그들이 원하는 답을 자신도 모르게 해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난로를 껴안고 분신을 시도했던 서승은 한때 사형수였다. 서준식은 1971년부터 1988년까지 옥중에서 쓴 편지를 여러 차례 펴냈는데, 서경식 선생님의 책보다 먼저 본 건 형성사에서 출간된 책이다. 그 후 야간비행에서 『서준식 옥중서한』을 묶어서 펴냈지만 노동사회과학연구소에서 저자 교열판으로 2015년 다시 나왔다.
내가 인생 책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 책이 몇 권 있는데, 서경식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기』도 그 가운데 하나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우리가 알지 못하던 진실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4월이 되면 제주도 4·3을, 5월이 되면 광주 5월 민중항쟁을, 6월이 되면 87년 민주화항쟁을 기렸다. 학교에는 대자보가 빼곡하게 나붙었고 과, 단과대, 총학생회 자료집도 쏟아졌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자각은 부끄러움이 되고, 다시 죄책감이 되었다.
하지만 최루탄 자욱한 거리에서도 계절은 아름다웠다. 캠퍼스의 낭만은 개뿔, 하는 마음 곁에는 언제나 들뜬 마음이 있었다. 공강 시간에 학교 안을 배회하면 꼭 소풍을 온 것 같았다. 힘을 주어 대의를 말하는 선배를 보면 주눅이 들고(날라리 선배들도 많았는데, 왜 그런 선배들과만 놀았을까?), 화사해졌던 마음이 착잡해졌다. 도서관에 들락거린 것은 책이 좋아서라기보다 그냥 조용히 숨어 있을 데가 필요해서였다.
그렇게 오가다 서경식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만났다. 지금이야 대학 시절 유럽 배낭여행이 필수지만 그때 해외여행은 우리 생애 이뤄 볼 수나 싶은, 손에 잡히지 않는 꿈 같았다. 지금 살고 있는 세상만으로도 버거워서 그 바깥을 기웃거릴 식견도, 여유도 없었던 나는 어느 돈 많고 태평한 예술애호가의 서양미술 관전기겠지 하면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꼭 교과서 같이 생긴 작은 판형에 도판의 상태도 매우 불량했다.
저자인 서경식은 아버지가 일제시대 때 일본으로 이주하면서 거기서 태어나 자란 재일조선인이다. 일본이 경제적으로 한국보다 우위였기 때문인지 그때 나에게 ‘재일교포’라는 말은 돈 많은 집으로 일찌감치 양자 들어간 친척 같았다. 뭘 몰라도 한참 몰랐다. 저자도, 미술도 모르는 이중의 어려움 속에서 이 책을 집어든 건 대학생이 되었으니 교양도 좀 갖춰야 할 것 같고, 잘 모르는 것도 알고 싶어서였다.
프랑스의 낭만과 영국의 위엄이 살아있는 고전 명화들을 기대했는데, 첫 그림부터 생면부지에 고개를 돌리고 싶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첫 그림 『캄비세스왕의 재판』은 화가 헤럴드 다비드가 그린 것인데, 분명 살아 있는 사람의 살가죽을 장인의 섬세함으로 벗기고 있었다. 중세 종교화 가운데 아름답기로 유명해서 나도 아는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를 보러 산마르코 수도원까지 가서는 『책형도』에 마음을 빼앗긴다.
“못이 박힌 두 손에서 떨어지는 피, 발의 상처에서 흘러 떨어져 기둥을 적시고 바닥으로 번져나가는 피, 그리고 오른편 가슴의 성흔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분출하는 피……” 무심히 지나가는 서유럽의 정경과 이런 그림들 위로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재일조선인인 자신, 조국으로 유학 갔다가 간첩으로 몰려 모진 고문을 견디며 10년 넘게 수감생활을 하는 두 형, 아들들의 고초를 지켜보다가 병에 걸려 차례로 세상을 떠난 부모님, 그런 부모를 수발하며 제 삶을 챙겨야 했던 누이의 얼굴이 차례로 흘러갔다.
담담한 어투 속에서 그가 감당해 온 슬픔과 아픔을 가늠할 수 있었지만 자기 연민에 빠져 비극을 과장하기보다 이 세상 모든 곳의 아픔을 자기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자기 삶에서 비롯되었으나 거기에 머물지 않다니. 나는 그가 좋아졌다. 그가 오래 쳐다보는 사람들은 ‘진정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사람’, ‘수첩과 도장으로 늘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사람’, ‘늘 죽음의 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 ‘모어(母語)의 공동체로부터 떼어져 다른 언어공동체로 유랑해간 사람들’(『디아스포라 기행』)이다.
그가 타자에 대한 거대한 폭력으로 인류사에 남은 아우슈비츠에 오래 머문 것은 당연했다.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나치 독일의 손이 미치는 모든 지역에서 유대인 사회가 파괴되었고 약 9백만 명의 유럽 유대인 중 3분의 2가 살해됐다. 특히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유대인 주민의 90퍼센트가 죽었다. 죽는 게 차라리 축복일 수용소마저 대부분 육체노동이 가능한 젊은 남녀만이 갈 수 있었고, 남은 노인과 아이, 여자, 환자들은 수용소에 가지도 못한 채 죽었다. 수용소의 최종 목표도 결국 절멸이었다.
18세기 말 이래 계몽주의는 보편적 ‘인간’이라는 이념을 받들었다. 그 덕분에 노예제도가 사라지고 여성의 권리가 옹호되었으며 타자를 향한 각종 차별과 편견이 비판받았다. 그런데, 이성의 힘으로 역사가 착실하게 진보해 가고 있다고 믿을 무렵, 20세기 한복판에 제국주의와 전쟁이 나타났다. 이렇게 써 놓고만 보면 20세기에 어떻게 이런 일이, 싶겠지만 이런 일은 인간의 역사에서 반복되어 왔다.
아메리카 대륙에 먼저 상륙한 에스파냐인의 이야기를 적은 라스 카사스의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서』에 따르면 아메리카 도착 이후 40년 동안 1,200만 명 내지 1,500만 명의 원주민이 희생되었다. 영국이나 프랑스가 식민지에서 저질렀던 일, 노예무역을 비롯해서 아프리카에서 일어났던 일, 그리고 일본이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했던 일도 다르지 않다.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했던 일, 군부가 광주에서 했던 일은 또 무엇이 다를까?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 이런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도 책을 읽는 동안 그림과 분위기만으로 자꾸 슬프고 아팠다. 그 그림들이 갖고 있는 폭력의 기억, 냄새, 감촉, 뭐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싫은 느낌’이 자꾸 어떤 기억들을 환기시켰다. 그 후로 그가 쓴 모든 책들,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고뇌의 원근법』, 『나의 조선미술 순례』 등의 책에서 미술과 음악, 문학은 끊임없이 그 느낌과 기억을 재생시킨다.
나는 서경식이 이 재생의 노력을 지금처럼 계속해 주기를 바라면서 그의 신간이 나오면 무조건 산다. 책을 만든다면 이런 책을 만들어야 할 거라고도 생각했다. 고통을 기억하는 것이 즐거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그가 지치지 않기만을 빈다. 책은 제가 계속 사 드리고 소문도 내드릴 테니. 한나 아렌트가 「우리 망명자들」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단다. “망명자는 싸우는 대신에, 또는 어떻게 하면 저항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대신에 친구와 친척의 죽음을 바라는 데에 익숙해져 버렸다. 누군가 죽으면 그 사람은 이제 어깨의 짐을 전부 내려놓았구나 하고 쾌활하게 생각해 보곤 한다.”
서경식도 이 말을 받아 이렇게 썼다. “아는 재일조선인 중에 자살한 이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떠올려 봐도, 화를 내야 할 때 서글프게 웃고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하다가 스위치를 뚝 끄듯이 사라져 버렸다는 인상이 강하다. 그런 죽음과 만났을 때 나의 마음에 일어나는 감개는 잘 표현할 수 없지만, ‘아, 역시나’ 하는 심정에 가깝다. ‘그 사람은 이제 어깨에 짐을 전부 내려놓았구나’ 생각하고픈 마음을 알 것 같다”고.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상처를 보여주는 그리스도』라는 채색 테라코타상이다. 조각가가 누군지도 모른 채 15세기 첫 사반세기 때 것으로 피렌체 산타 마리아 누오바 의료원 부속건물 출입구 위를 장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할 뿐이다. 지친 얼굴의 그리스도 조각상은 두 손의 손가락으로 오른편 옆구리의 상처를 활짝 열어 보여 주고 있었다. 상처는 깊은 구멍으로 움푹 파여 있었다.
나는 서경식과 모든 고통 받는 사람들이 그 그리스도의 표정으로 자신의 상처를 내보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곤 한다. 그걸 보는 순간 언어와 민족, 국가를 초월해서 느낌으로 전해지는 것, 책을 만드는 사람이 된 후로 나는 내가 만드는 책이 그런 것들을 담았으면 하고 바란다. 아쉽게도 아직 이루지는 못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