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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유 Nov 22. 2016

행복한 왕자

읽는 삶, 만드는 삶 첫 번째 이야기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먼저 읽은 책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읽은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다. 이걸 어떻게 이렇게 정확하게 기억하냐면 내 인생에 딱 네 번 있었던 문화충격 가운데 첫 번째였기 때문이다. 거실이 있는 서울의 아파트, 100권짜리 어린이용 전집을 처음 보았을 때, 세상에 이런 것도 있구나 싶었다. 부모님은 책을 읽는 분들이 아니었다. 여흥으로 읽을 잡지 한 권 보기 힘들었던 시골에 살았던 내게 규격이 일정한 책이 100권이나 꽂혀 있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자마자 섬으로 이사를 갔다. 학교에 다니긴 했지만 섬에서는 친구를 사귀기가 어려웠다. 들고 나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한 학교에 입학하면 그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졸업 때까지 같이 다니는데, 외부에서 흘러 들어왔다가 다시 금방 빠져나가는 나 같은 아이에게는 곁을 주지 않았다. 나와 노는 아이들은 놀이에 끼워 주지 않겠다고 노골적으로 ‘왕따’를 시키던 아이도 있었다.

놀 친구들이 없어서 바닷가에서 낚시로 작은 게를 낚으며 놀았다. 그것도 지치면 어른들을 따라 다니며 놀았다. 해군 부대에 가서 노래자랑을 하고 피엑스PX에서 새우깡을 얻어먹고, 아빠를 따라 작은 배를 타고 근처 바다에 나가 해군들이 즉석에서 따온 전복도 먹었다. 꽃게철이 되면 게도 엄청 얻어먹었다. 며칠씩 태풍주의보가 내려 배가 못 뜨면 냉동이나 다른 가공을 하고 남은 게를 집집마다 돌렸다. 안 그러면 다 버려야 했다. 붉은 ‘다라이’ 한 가득 아직 살아 버르적거리는 남자 어른 손바닥 두세 배 크기의 게를 담아 오면 솜씨를 부릴 시간도 없어서 바로 쪄 먹었다. 여태 살면서 이것보다 맛있는 게를 먹어 본 적이 없다.(역시 어른의 놀이는 식도락인가?)

지금은 쾌속선이 생겼지만 그때는 배로 인천까지 12시간 거리였다. 섬을 벗어나는 것도, 다시 돌아오는 일도 큰마음을 먹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시댁도 친정도 없는 낯선 곳에서 늦둥이로 태어난 갓난아이까지 아이 넷을 혼자 돌봐야 했던 엄마가 아이들 방학 동안 숨이라도 쉬려면 아이를 하나라도 덜어내야 했다. 마침 서울 사는 외사촌 하나가 외동이었는데, 그 아이와 내가 서로 잘 맞아서 여름방학 동안 와서 놀아 주기를 청했다.

배 타고 버스 타고 1박 2일이 걸려 도착한 사촌의 집은 입주한 지 얼마 안 되는 서울 내발산동 주공 아파트, 거실이 있고, 입식 부엌이 있고, 아이 방이 따로 있었다. 이 집에서는 외숙모가 식빵을 우유와 계란에 적셔 마가린에 구운 프렌치토스트를 아침으로 주었다. 그해 여름, 외삼촌은 사촌을 위해 100권짜리 세계명작동화전집을 들였다. 책이 흔해진 지금이야 그깟 100권쯤이야 하겠지만 그때 내겐 그렇게 많은 책을 본 일 자체가 경이로웠다.

이것을 한국 출판 역사에서는 1980년을 전후로 불었던 가정방문판매 전집 붐이었다고 기록한다. 금성 에이스문고, 계몽사 소년소녀세계명작전집 등 당시를 주름 잡았던 숱한 전집 이름을 뒤늦게 책에서 보았지만 내가 본 전집이 어느 출판사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이 전집의 1번이 바로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였다. 그 책을 펼쳤을 때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영롱한 원색으로 치장한 왕자의 동상이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뾰족한 교회 종탑과 긴 창문의 집들이 들어찬 이국의 거리였다. 난생 처음 들어 본 루비, 사파이어…… 보석 이름들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그 왕자의 동상이 서 있는 도시를 상상해 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오가다 왕자의 동상에 눈길에 닿을 때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왕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왕자의 얼굴은 슬퍼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제비가 우연히 찾아왔다. 갈대에게 실연당하고 겨울을 보내기 위해 이집트로 가던 길에 왕자의 동상에 머물게 된 제비는 왕자의 사연을 듣는다. 왕자는 매일 밤 마을을 굽어보는데, 왕자의 눈엔 사정이 딱한 사람들만 보인다. 아픈 아이를 눕혀 놓고 공주의 시녀 옷을 짓느라 밤새 일을 하는 여인, 땔감이 없어 찬 손을 불어 가며 희곡을 쓰고 있는 배고픈 작가, 성냥을 개울에 빠트려 집에 빈손으로 갈 걱정을 하는 성냥팔이 소녀, 굶주린 채 쫓겨 다니는 어린 아이들, 왕자의 슬픔은 그런 사람들에게서 왔다.

모두를 내려다보는 높은 자리에서 화려하게 치장한 채 서 있는 왕자가 느낀 감정은 죄책감이었을까? 책임감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연민이었을까? 제비는 갈 길을 늦춰 가며 왕자의 부탁을 들어준다. 왕자의 칼자루에 박힌 루비를 뽑아다 밤늦게까지 재봉질을 하는 여인에게 건네고 날갯짓으로 아픈 아이의 열을 식히고 돌아온 후에도 제비는 왕자를 떠나지 못한다. 제비는 말한다. “따뜻했어. 추운데 따뜻했어.” 왕자는 답했다. “네가 착한 일을 해서 그래.”

그것보다 더 내 마음에 오래 남은 건 제비가 왕자 어깨 위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던 장면이었다. 사파이어로 된 두 눈까지 내주고 장님이 된 왕자 곁에서 제비는 매일 먼 나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일강가의 새들, 세상 모든 일을 알고 있던 사막 한가운데의 스핑크스, 커다란 호수에서 나뭇잎을 타고 다니던 난쟁이들. 하지만 왕자는 가까이에 사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제비가 도시를 돌아다니며 본 가난한 사람들 이야기를 해 주면 왕자는 자기 몸을 덮은 황금 조각까지 내주었다. 제비는 끝내 왕자 곁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몇 번이나 눈물이 났다.

보석과 금이 모두 벗겨져 흉물로 변해 버린 왕자를 녹여 누구의 동상을 만들 것인지 싸우는 사람들은 한심했지만 용광로 속에서도 끝내 녹지 않은 왕자의 납 심장이 죽은 제비와 함께 하느님에게로 간 것은 참 좋았다. 처음 읽었을 때는 아직 어린 아이였으니 이게 다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먼 나라의 신기한 이야기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 그들을 돕는 마음 착한 제비와 왕자, 그 둘의 아름다운 우정, 그런 것만 기억난다.


『행복한 왕자』와 그 책을 둘러싼 기억들 덕분에 내게 독서는 마가린 향이 밴 프렌치토스트, 하얀 레이스 커튼이 방마다 걸린 깔끔한 아파트, 높고 긴 창문을 가진 이국의 건물들, 알록달록하고 반짝거리는 보석과 황금, 먼 나라의 신기한 이야기들, 가난한 이들을 돕는 착한 마음이다. 그것들은 모두 좋고 아름답다. 부드럽고 폭신하고 달콤한 맛, 빛나고 아련한 사물들, 슬프지만 결국 행복해지는 착한 사람들. 내게 책은 그런 동경의 결정체였다.

외사촌 집에 있던 여름방학 동안 100권을 다 읽어 버렸다. 다른 책들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40번 대에 있었던 『마더구우즈 동화』만 기억나는데, “이 세상이 커다란 만두라면”으로 시작하던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였다. 이 경험은 나를 조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시시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더 이상 나랑 놀아 주지 않는 친구들이 원망스럽지 않았다.

책을 읽는 동안은 혼자서도 심심하거나 외롭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애들이 못되게 굴어도 나는 너희와 다른 사람이야, 너흰 이런 걸 모르겠지 하면서 코웃음을 칠 줄도 알게 되었다. 섬으로 돌아가서 게 낚시를 더 다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책을 구할 수 없었으니 책을 더 읽을 수도 없었다. 그래도 『행복한 왕자』를 생각하면 ‘혼자라도 괜찮아’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게 얼마나 큰 위로였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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