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기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사 Sep 19. 2023

방통대 법학과 변론대회

나이 많은 사람들의 학습기

본래는 참여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그도 그럴 것이, 분명히 육아맘에 직장인이니 이걸 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일인데, 시험이 끝나서일까. 문득 앉아서 주제를 보는데 내용이 흥미로웠다. 아는 게 쥐뿔도 없는 한 학기만 수강한 입장에서 갑자기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학습관 학생회장님에게 연락을 했다. 만약 자리가 있으면 제가 (감히) 들어가도 될까요. 논문이라고는 졸업하던 그 시절에 써본 게 전부이고 법학논문은 발가락도 담궈본적 없는 상태에서 대뜸 가봐야지 했다. 하지 말아야할 이유보다 해야할 이유들이 스멀스멀 떠오르기 시작했다. 애초에 나는 3학년 편입이라 하고 싶어도 이런 기회 자체가 여름에 두 번. 이번에 하고 내년에 하면 바로 졸업이니까. 

보통 할까 말까 할 때는 해보고 후회하는 게 더 속이 편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그래서 준비과정에 열심히 했는가


교수님들이 다독여주고 안쓰러워하는 것에 비해 내 경우는 그렇게까지 헌신하지는 못했다. 내가 골랐던 주제는 공법상 문제에 대한 이야기인데 형법과 형사소송법, 그리고 이에 대한 논증방식까지 따져야하니 그 모든 게 쉽지 않았다. 모아지는 시간, 입장을 정하는 시간도 촉박했고 그리고 만나는 시간도 그리 많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든 아웃풋을 내는게 조금 버거웠다. 그러니까 예전부터 접했던 흔한 조별과제다. 아득한 대과거의 조별과제도 항상 역할을 나누면 산으로 가기 일쑤였다. 오히려 그 시절에는, 나의 주전공을 하거나 내가 고학번이거나 내가 체력이 좋거나 등의 이유로 6인이 해도 반은 해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워낙 많았어서 그에 대해서 개의치 않는 편이었다. 오히려 그렇게 하더라도 일이 되기만 하면 크게 신경쓰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게 조금 어려웠다. 일단 내가 많이 하겠다고 하기에는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했고, 강하게 주장해서 이끌어가기에는 아는 것이 너무나 없고 다른 이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쪽을 더 선택하게 되더라.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틀린 방식은 아니지만, 오히려 사회생활을 할 때는 당연한 덕목이지만, 짧은 시간에 결과물을 내야할 때는 그리 효율적이지는 않다. 다 끝나고 나서는 차라리 조금 더 강하게 주장했어야 하는 부분이 있지 않았나 하는 반성의 포인트도 생겼다. 아마도 그것은 학부 졸업 이후로 사회에서 구르다보니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 방향으로 길들여진 내 탓이 큰 것 같다. 준비 과정에서도 치열하게 의견이 대치해도 되고 그 사이에서 더 좋은 결론이 날 수 있었을 텐데, 예의를 차리기에 급해서 살짝씩 양보하던 것이 결과물에 비친 면이 있지 않았을까. 


변론대회 전날 


대진표를 보고 나니, 약간 아득해졌다. 다른 팀의 논문은 무려 14개 정도라서 모든 걸 다 읽고 가겠다고 분명 그 전에 2주 정도 시간이 있었지만, 역시 또 회사일에 치이고 다른 일에 치이다보니 하나 보고 덮기에 일쑤였다. 솔직히 닥치기 전까지 그걸 다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가 잠시 우리팀 모임을 하고나니, 아 전혀 준비해가지 않으면 당일 날 그 자리에서 조금 창피할 수 있겠다 싶은 자각이 들었다. 늦은 저녁에 모여서 보니 다른 팀의 논문을 읽지 않으면 질문하는 시점에 아무것도 할 말이 없을 수 있고, 상대방이 어떤 질문을 할 지 대비하지 않으면 말 그대로 쪽팔리게 시간을 허비하고 내려올 것 같았다. 다른 것보다 문자 그대로의 쪽팔리는 건 정말 싫어하는 편이라 부랴부랴 밤 10시부터 다른 팀들의 논문을 하나씩 다 훑어가며 읽었다. 원래 10시에 자는 편인데 그 날은 별 수 없었다. 새벽 2시까지 짚어야 할 부분을 복붙을 하고 질문을 pages에 주루룩 붙여갔다. 어차피 시간이 부족해서 그 자리에서 파일을 다 열어볼 수는 없을 것이라는 예상때문이었다. 그리고 각자 읽을 논문을 나누었지만, 왠지 모르게 다 보아야만 할 것 같았다. 


같은 사안에 대한 다른 관점의 논문을 연달아 읽기 


대충 자정을 지날때쯤이었나, 졸리기 시작한데 약간 정신을 붙들고 싶어서 스우파2를 틀어두고 보았다. 그러다보니 왜 이런 배움의 과정이 있는 지를 알 것도 같았다. 그냥 논문을 번듯하게 쓰고 그 자리에서 입만 털고 오는 게 아니라 같은 이야기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한 것과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은 지향점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이들의 서술방식을 보고 자신의 방식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였던 것 같다. 솔직히 같은 사건에 대한 10개 이상의 논문을 연속적으로 보는 건 조금 힘들다.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중복된 것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피곤해진다. 그렇지만 발등에 불 떨어졌을 때는 결국 다 보게 되고 이렇게 작성한 사람들을 다음 날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고 하니 약간 설레기도 했다. 


TPO에는 셔츠지 


직업적 특성상 혹은 어떤 이유에서든 대부분의 경우 나는 회사에서 스웻셔츠나 티셔츠만 입고 다닌다. 격식을 크게 차릴 필요가 없기도 하거니와 활동이 편한 걸 중요하게 생각해서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왠지 전문적으로 보이고 싶기도 하고 온라인 오리엔테이션에서 보았을 때 보면 내가 연령이 어린 축에 속하다보니 약간은 포멀하게 하고 싶었다. 잘 입지도 않는 푸른색 셔츠를 하나 빼서 입었다. 별 수 없이 슬랙스를 입고 운동화를 챙겨신고 나의 분신같은 노트북, 아이패드를 들고 짐을 챙겼다. 심지어 더 편하게 입겠다고 추리닝과 스웻셔츠도 챙겨갔다. 정말로 변론대회 그 때만 셔츠를 입고 이후에는 안 입을 생각이었다. 남들은 흔하게 입는 그런 셔츠를 말이다. 


빨간 이름표 


경기지역대학의 경우는 새빨간색 종이에 이름이 박혀있다. 푸른색 셔츠 위에 입어서인지 그 대비가 엄청 났다. 본명이 박힌 이름표도 새로웠다. 회사에서는 영어닉네임만 부르다보니 종종 이름을 잊게 되는데 이게 너무 신기했다. 


본선, 3팀의 토론


처음에는 마이크를 잡고 말할 때 정말로 너무 떨렸다. 원래 그도 그럴 것이 다수의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는 경험이 완전히 나만 아는 내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때가 주였지, 이번처럼 다들 아는 내용에 대해 굳이 의견을 피력하는 건 아주 오랜만이라서. 그리고 나니 조금 긴장이 풀어졌다. 스스로 약간 이상하다고 느낀 지점이 있었다.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있는 나는 약간 웃고 있었다. 비웃는 느낌과는 거리가 멀게, 나는 그냥 이 순간 자체가 즐거웠던 것 같다. 이렇게 곤란한 상황에서 나는 이런 식으로 결론을 냈는데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했을 지를 대회라는 포맷에 녹였을 뿐 결국 대화에 가까우니까. 당장 매출액이 어떻고 구현이 어떻고 하는 현실적인 이야기 말고 조금 형이상학적으로 흘러서 즐거웠을까. 나도 적은 나이가 아니지만 더 연배가 있으신 분들과 같은 위치에서 토론하는 순간들이 꽤나 흥미로웠다. 


3,4위 전 


조금 느낌이 달랐다. 누가봐도 2030으로 보이는 분들이 네명 앉아있었는데, 다시 마치 학부로 돌아간 느낌. 개인적인 경험으로 치자면 나보다 더 많은 걸 배우신 것으로 보여서, 아 나도 형사소송법을 학습하고 왔으면 조금 더 나았을까 하는 반성과 함께. 판례와 조문을 외운 것처럼 읊을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법학도가 될 수 있는 걸까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애초에 시작한 것부터 잘못이었던 걸까 하는 생각. 그렇지만 내 기억의 토론은 상대방과 나의 의견이 대치될 때 그 지점에 대해서 의견을 피력하고 논파하는 것인데 어딘가 모르게 대화가 뚝뚝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어디서부터 문제였는 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물리적 거리가 현저히 멀어져서인지, 내가 익숙하지 않은 사투리 섞인 말은 길어지면 종종 놓치는 탓인지. 다만 내 속의 아쉬움은 나도 그만큼 더 익힌 다음에 이야기를 했으면 저분들과 이야기가 보다 더 잘 통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어쩌면 내가 그분들의 말을 따라가지 못했을 수도 있다. 


끝나고 나서 


결국 이어져서 장기자랑까지 보게 앉아있게 되었다. 그런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앉아야하면 또 자리를 잘 채워서 버티는 편이다. 복도를 지나가면서 보던 분들은 변론대회를 잘 보았다, 인상깊었다라는 멘트를 해주셔서 살짝 기운이 났다. 사회생활과 공연으로 다져진 스테이지용 미소를 장착하고 답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칭찬이 어색하기도 하고 쑥쓰럽기도 하고. 어떤 분이 지나가는 말로 로스쿨을 생각해보라는 말이 약간 마음이 복잡했다. 어려보였나, 와 그만큼인가, 무엇이 맞을까 하는 복잡한 심경이 섞였다. 


그래서 다음에 또 할 것인지


모르겠다. 당장 다음달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으니 내년을 쉽게 기약하기에는 정말 한치앞도 모르니까. 그리고 그 전에 들어야할 과목이 정말 많으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2023년 1학기 (4) 끄읏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