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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Chive May 06. 2023

2. 스토너

성실하고 묵묵히 인내하는 삶, 그 가치에 대하여

   저번 '자기 앞의 생'에 이어서 올해 목표인 '집에 사놓고 묵혀뒀던,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손이 안가던 책들 독파하기'의 두번째 책은 '스토너'다. 이 책을 읽고나서, 조금 엉뚱하긴 하지만 처음으로 생각났던 음식이 있다. 바로 평양냉면이었다. 


   내용이 참 오묘하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윌리엄 스토너의 생애를 그리고 있다. 그의 인생은 글로 엮어내기엔 너무나도 평범하다. 스토너는 콜롬비아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가 농사에 도움이 될 기술을 배워올까 싶어 미주리대학 농대에 그를 입학시킨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스토너는 농업기술이 아닌 영문학과 사랑에 빠진다.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삶의 열정을 태우고, 영문과 조교수로 살며 남들처럼 결혼을 하고, 사랑에 빠지고, 가르치는 학생 문제(찰스 워커)로 학과장과 마찰도 빚으며 살다가 마지막에는 암으로 생을 마감한다. 책 도입부에 나왔듯 그가 출판한 책 역시 "망각 속에 묻"혔다.  


   그의 생에 반전은 없었다. 이게 이 책의 매력 포인트이자 골치가 아픈(?) 부분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의 생에 장애물 같은 인물들에게(아내인 이디스, 학과장 로맥스, 기만적인 대학원생 찰스 워커 등) 저항하고, 이겨내는 장면을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다른 분들도 그걸 기대하면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 책을 읽으셨을거다. 그것이 대부분의 '소설'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니까. 


   하지만 누군가가 인터넷에 남긴 짧은 댓글처럼 '고구마만 한 100개 먹다가 끝나는 소설'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스토너의 생은 밋밋하고 단조롭다. 마치 누군가에게는 평양냉면이 걸레 빤 물이라고 느껴지는 것처럼, 이 책도 어쩌면 이러한 이유로 호불호가 갈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50여 년 전, 이 책이 출간 1년 만에 절판되었다가 뒤늦게 발견되어 2010년대에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간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이 책이 그런 책이어서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스토너를 좋아하게 된 이유가 있다. 마냥 단조로운 삶, 밋밋하고 반전이 없는 삶. 그게 사실 우리 인간 대다수가 사는 모습이다. 실패한 결혼생활, 빈부차이를 극복하고 한 그 결혼에서 나타나는 부인의 횡포, (외도기는 하지만) 진실한 사랑을 하였으나 학과장의 방해로 인하여 실패로 끝난 사랑, 학문에 대한 열의로 조금씩 인기를 얻어가는 저술과 강의로 조금은 자신의 본궤도에 올랐나 싶었지만 기만적인 대학원생 하나로 인해 초임강사도 마다할 기초과목만 맡게되는 교수로서의 지위 추락. 이 모든 상황에 그가 취할 수 있던 '일반적인' 선택지는 많았을 것이다. 가부장적인 모습으로 부인을 휘어잡을 수도 있었을 거고, 자기보다 학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로맥스에게 대항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자신의 진짜 사랑인 캐서린과 도피를 택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문제를 정면으로 부딪힌다. 평생을 요령을 피울줄 모르고 고지식하게 살기에 책을 보는 내내 '아이고, 이 양반아...' 싶은 안타까운 생각이 들다가도, 적어도 그는 자신의 삶에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의 결과를 피하지 않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온 몸으로 받아낸 사람으로 난 그를 기억할 것 같다. 그의 삶에는 속된 말로 '꼼수'가 없다. 마지막 부분에 가면 그 모든 생이 쌓이고 쌓여서 마치 엄청 거대한 고목(木)을 보는것처럼 경외로운 눈으로 보게된다. 

    

    부모님이 만들어준 길을 택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택할 용기, 남들이 다 나가는 전쟁터에 자신이 나가지 않으면 남들에게 어떻게 비춰질지 뻔히 알면서도 나가지 않고 자신이 사랑하는 학문을 택하는 용기, 나의 윗사람과 끝까지 대립하지만 퇴직까지 버틸 수 있는 인내심, 승진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꾸준히 자신이 연구하고 싶은 분야를 연구하여 저서를 출간하고 교육에 대한 열의를 꺼뜨리지 않는 열정의 불씨. 스토너는 마지막까지 스토너로 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실패했고, 수동적이고, 자신의 삶에 질질 끌려간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주체적으로 살았다. 과시하지 않고 묵묵히, 마치 자신의 내면을 찾기위해 평생을 바치는 수도사 같았다. 특히 마지막 그의 죽음 직전의 장면은 경외롭고 감동적이었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중략)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감각이 갑작스레 강렬하게 그를 덮쳤다. 그 힘이 느껴졌다. 그는 그 자신이었다. 그리고 과거의 자신을 알고 있었다." (390쪽)  



   20대 때 내가 이 책을 읽었다면 몰랐겠지만, 지금은 이런 삶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는 지극히 평범하고 실패한 삶이지만, 적어도 자신의 길을 갔던 그의 생이 내 가슴속에 평양냉면처럼, 거대한 고목처럼 남게된 것 같다. 삶은 겉으로 보기엔 로맥스처럼, 몇 개월 전 히트친 더 글로리의 하도영처럼 '나이스한 개새끼'들이 성공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눈에는 잘 안 보여도 묵묵히 자기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나아갔던 스토너의 삶도 충분히 훌륭하다고 예전보다는 조금 더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게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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