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드마크 같은 사람이 있다. 어떤 장소가 돼버린 사람. 그 사람은 그곳에 가야만 볼 수 있다든지, 그곳에 가면 그 사람 생각이 절로 난다든지. 장소로 기억되는 사람. 좌표로 남겨진 이름.
약속이 돼버린 사람도 있다. 그 시간이 되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든지, 그 계절이 오면 기억이 난다든지.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는데 철저하게 내가 버려진 듯한 느낌을 주는 새벽 시간 같은 때. 그 시간이 되면 불현듯 가까스로 잊은 것들만 모아서 기어코 내 앞에 살아오는 사람.
기억할 만한 그곳과 그 시간을 함께 소유한다는 건 축복인가 불행인가. 내가 아는 이 중에는 봄만 되면 스페인으로 떠나는 사람이 있다. 사랑했던 여자를 기억하기 위해 그라나다로 간다고 한다. 내가 아는 이 중에는 반대로 그가 없는 그 나라의 겨울이 싫어 짧은 옷을 챙겨 서울의 여름으로 들어오는 여자도 있다. 추억은 꽤나 집요한 구석이 있어서 끈질기게 마치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착 달라붙는다.
길을 잃었을 때 내가 있는 좌표를 말할 수 있어야 구조될 수 있다고 어느 소방관이 알려주었다. 당신에게 흠뻑 빠져 있을 때 나는 나의 좌표를 알 수 없었다. 이제 나는 지금의 좌표를 겨우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길을 잃을 염려도 없게 되었다. 추억을 피해 쫓기듯 길을 돌고 돌아가는 일도 없게 되었다. 괜스레 슬퍼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있는 곳을 몰랐을 때, 나는 행복했던 듯싶다.
어떤 관계는, 내가 있는 곳이 아니라 그가 있는 곳에서 태어나고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