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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의 매력, 평창에서 다시 쓰는 '메밀꽃 필 무렵'

Feat. 하루 한 장 나의 어휘력을 위한 필사노트

by MinChive

예나 지금이나 딱히 쓰고 싶은 이야기도 없는데, 그래도 뭐라도 오늘의 기록을 남기고 싶다는 욕심이 생길 때 집에서 하는 일은 '필사'다. 필사의 주요한 장점은 어휘력의 증진과 여러 텍스트를 만나며 얻게 되는 통찰력이다. 텍스트를 입체적으로 해석하고, 맥락을 찾아 이해하는 과정에서 통찰력은 저절로 생기는듯하다.


통찰력은 육감이 아닙니다. 타인의 세계에 응답할 줄 아는 공감력과 텍스트를 입체적으로 해석하고 맥락을 찾아내는 이해력, 이에 더해보고 싶지 않은 현상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창의력을 발휘해 최선의 방향을 알아내는 것입니다. 창의력을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는 능력'으로 풀이하는 데 이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기보다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발상의 전환에 가깝습니다.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의미와 용법을 부여해 활용할 줄 아는 것이지요. 흔히 최고의 지성이라고 할 때는 바로 이 '통찰력'을 일컫습니다. '최고'라거나 '지성'이라는 어휘에 압도되지 마세요.

- 유선경, <하루 한 장 나의 어휘력을 위한 필사 노트>


부수적으로 나에게 필사는 그날의 컨디션 판독기 역할도 한다. 그 날 만난 문장을 연필로 옮기다 보면 글씨만 봐도 오늘 컨디션이 보인다. 집중을 못하여 문장을 하나 빼먹고 다음 문장으로 넘어간다든지, 안 그래도 악필인 내 글씨가 한층 더 악필인 날이 있는가 하면, 어떤 날은 글씨의 상태가 좋은 것은 물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필사에 푹 빠져 어떤 실수도 없이 필사를 하는 날도 있다. 필사 상태가 안 좋은 날은 오늘의 나를 다잡고, 필사 상태가 좋은 날은 오늘은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을 갖고 하루를 시작하면, 적어도 완벽한 하루는 아니더라도 아주 망친 하루를 보내는 일은 거의 없다.


간혹, 필사를 하는 사람에게 어차피 문장을 외우는 것도 아닌데 이게 정말 내 어휘에, 더 나아가 통찰력에 정말로 도움이 되냐는 질문을 하시는 분이 있다. 그게 아니라면 학생 시절에 쓰던 '깜지' 숙제나(보통 벌칙으로 많이들 쓰셨을 거다. 지금도 그러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거나 뭐가 다른 건지 모르겠다는 분들도 더러 있었다. 나도 처음 몇 개월은 그런 생각을 많이 했었다. 의미 없이 손만 놀리는 시간, 나에게도 많았다. 지금은 그런 얘기를 들으면 슬쩍 웃음이 나온다. 비웃음이 아닌, '아.. 당신도 그 벽 앞에 서셨군요, 친구여.' 같은 마음과 비슷하다. 동지를 만나 반가운 마음에 가깝다고 봐야겠다.


그 벽은 보통 '양'과 '경험'을 통해 깨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기본적으로 필사량이 많아져야 내가 경험하는 세계를 새롭게 보려고 노력할, 그리고 그 세계를 나의 말로 표현할 기회라도 주어진다는 뜻이다. 애초에 재료가 부실하면 1급 셰프가 와도 한계가 있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게 어떤 새로운 '경험'을 통해 내 것이 된다고 생각을 한다. 오늘이 딱 나에게는 그런 날이다. 오늘 내가 필사한 책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메밀꽃 필 무렵'이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가제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붓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 리의 밤
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中


'메밀꽃 필 무렵' 우리에겐 교과서로, 혹은 한컴타자연습 긴 글 연습에 나오는 대표적인 글로 익숙하디 익숙한 소설이다. 아마 타자로는 몇 십, 몇 백 번은 쳐봤을 스트라 가벼운 마음으로 눈으로 한번 쭉 훑어보고 손으로 옮겨 적는데, 그때와는 전혀 다른 글처럼 느껴졌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이제는 봉평이 어디인지 알고, 대화가 어딘지 안다. 그 칠십리 밤길이 얼마나 새까만지 안다. 밤길을 지나가며 그들이 봤을 소금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이 뭔지 직접 눈으로 봤다. '대궁'이 '대'의 강원도 방언임을 알고 많이 들었다. 예전에는 전혀 관심도 갖고 있지 않던 단어 하나하나가 나한테 들어오는 과정이다. 이런 날은 필사가 끝나도 저 문장 안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진다. 이 순간이다. 많지는 않지만 가끔 오는 이 순간. 이것이 나의 필사의 이유이고, 이런 순간이 많아질수록 나의 수많은 '깜지'는 '필사'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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