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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짬뽕 뮬란 Dec 23. 2022

나의 우울증을 무시했던 너에게

긴 폐터널

너만 힘든게 아니라 세상 사람 너보다 더 힘든 사람이 널리고 널렸다며 넌 배가 불러서 우울증이라고 하는 거라며 나의 우울증을 무시했던 너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뒤늦게 생각하니 그 말이 가시에 찔린 것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아팠다.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아 약을 먹고 있다며 용기 내어 꺼낸 내 말에 콧방귀를 뀌던 너에게 나는 무엇을 잘못한걸까 수십번도 더 고민했다. 왜 나는 너에게 그런 소릴 들으며 가만히 앉아만 있었던 걸까 생각했다.    

  

그런데 긴 터널을 지나온 듯 우울증이 점차 나아지니 너가 이해가 됐다. 너는 그냥 나와 다른 생각과 관념을 갖고 사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그저 다를 뿐이었다는 걸. 나는 그것도 모르고 오랫동안 아팠다. 긴 폐터널을 지나와보니, 이제야 햇빛을 보게 되니 조금은 알겠다. 너도 힘들었구나. 그래서 남들이 너에게 힘듦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낼 때 반사적인 행동을 했던 걸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너가 힘드니 다른 사람 말을 들어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거였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언젠가 너는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너가 어렸을 때부터 부러웠어.” 이해하지 못했지만 남들이 나를 겉보기에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나는 내인성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았었는데 내인성 우울이란 유전적인 요인이나 어린 시절의 가정 환경 같은 요인이 크게 작용하는 우울증이라고 한다. 별다른 스트레스 요인이 없어도 작은 일에 쉽게 우울해지고 자주 재발하는 경향을 보이는 우울증이라고 했다. 

     

내인성 우울증이라는 것을 경험할 만큼 어린 시절의 가정 환경이 안 좋았나 돌아보게 된다. 어른이 되어 알게 된 사실인데 부모 없이도 잘 자란 고아원 친구들도 있고 부모가 있어도 매일 폭력이나 욕설에 시달리며 살아온 친구들도 있었다. 나는 그에 비하면 할머니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았던 것 같다. 지지리도 가난했지만 나를 위해 사는 할머니가 계셨기 때문에 나는 늘 든든했다. 그렇기에 나를 위해 살던, 오직 나의 세상이었던 할머니가 떠났을 때는 하늘이 무너졌고 두 다리를 잃은 기분을 느꼈다. 누군가 내 가슴을 망치로 때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 세상은 그때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그때만 생각하면 ‘내인성 우울증’이라는 말처럼 별다른 스트레스 요인 없이도 작은 일에 쉽게 우울해지는 건가 싶다.      


이런 나를 부러워했었다니. 너 또한 그 말을 용기 내어 꺼냈다고 하니 내가 무슨 말로 답해줘야 할지 모르겠더라. 나의 우울증을 무시했던 너에게 나는 어떤 말을 건네야 할까 수없이 고민했다. 또 하루는 뜬금없이 “우울증은 어떠냐”라고 묻는 너에게 나는 웃으면서 가볍게 물었다. “너 내가 우울증이었을 때 세상 사람 다 힘들다며 내 우울증을 무시했었잖아. 그래놓고 왜 우울증 괜찮냐고 물어?”라고 대답했다. “내가 그랬냐?” 하고 술을 한 잔 들이키던 너를 보며 어떤 실망도 느끼지 않았다. 기대가 없었나 보다.    

  

나는 다른 사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누군가가 오전에 내게 어떤 말을 했느냐에 따라 내가 어떤 말을 들었느냐에 따라 하루의 기분이 좌지우지된다. 그만큼 나는 내 안에 중심이 없는 사람이다. 연필에도 심이 있듯 단단한 내면의 심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런 내면의 힘이 부족하다보니 남들의 말에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쉽게 상처받고 내인성 우울증 진단을 받은 게 어쩌면 마땅하다는 듯 쉽게 우울해진다. 우울증이 다 나았구나 하고 느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우울증은 길도 잃지 않고 다시 나를 찾아왔다.      


왜 또 나야. 왜 하필 나야. 왜 나여야만 해. 하며 가슴팍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새벽마다 소리내어 울었다. 물론 매일 그런 것은 아니다. 나는 다시 찾아온 내 우울증을 외면한 적도 있었다. 내 기분이 우울해도 이게 나니까. 당연한 내 모습이니까. 눈물이 나고 입맛이 없어 며칠을 굶어도 죽기야 하겠어 했다. 나의 우울증을 무시한 건 남뿐만이 아니었다. 사실은 내 우울증을 가장 먼저 무시한 건 나 자신이었다. 내가 내 아픔을 무시했고 내 안에, 내 내면의 소리를 무시했다. 나의 우울증을 무시했던 나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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