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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화 May 11. 2020

شیرین نشاط Shirin NESHAT

작품에서 텍스트로

Shirin NESHAT (Persian: شیرین نشاط‎; born 1957)

 쉬린 네샤트의 작품에는 이제는 다소 친숙하면서도 여전히 불편할 수 있는 이슬람, 중동, 아랍, 이란, 여성이 text(관객에게 기호로 작용하는 것)로 등장한다. 과거에 비해 세계가 다층위적으로 폭 넓게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동서양에서 바라보는 이슬람 문화권은 물리적 거리만큼 심리적으로도 멀고, 신비롭다. 이러한 지점에서 네샤트는 '친숙하면서도 불편한 실험적 작품활동을 하는 작가'라는 텍스트가 잘 어울린다. 그는 이란계, 중동, 무슬림이라는 신비로운 배경과 미국의 선진 기술과 삶, 세련된(현대적인) 표현이라는 익숙한 방법으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이렇듯 이슬람과 비이슬람이 혼재된 불분명한 어느 지점에서 그의 작품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방법은 극단으로 나뉠 수 있고, 다양하며, 복합적(Multiple)이다.


*쉬린 네샤트의 Bio는 화면 하단에서 확인 가능


I Am Its Secret, Chromogenic print (c-print), 49.5 x 33.5 cm, 1993

 본 글에서는 특히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이슬람, 꾸란, 여성 text의 역할과 그에 따른 해석의 다양성, 복합성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아무래도 작품에 대한 해석은 이슬람과 비이슬람권의 시각으로 나뉘는 것이 대부분일 것으로, 세 단어에 대한 지역적, 문화적 이해가 상충하는 지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먼저 무슬림(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에게 꾸란(القرآن, Quran)은 신의 말씀이 들어 있는 경전으로 그들에게는 삶의 지침서와 같다. 세속적인 목적을 가지고 꾸란의 내용을 함부로 도용한다거나 농담의 수단으로 삼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꾸란에 쓰인 아랍어는 가장 신성한 언어라고 여겨진다. 일상적인 관점에서도 종교의 영향은 여실히 나타난다. 특히 종교 자체가 문화인 이슬람 지역권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해석은 타 지역과 다르게 독특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히잡(머리를 가리는 천)과 아바야(온 몸을 감싸는 검정색 옷)는 집안에만 있던 여성들이 사회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준 필수불가결의 수단이며, 여성이 집에서 아이를 보고 남편을 내조하는 것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것이다. 이들은 꾸란과 하디스(무함마드의 언행을 기록한 것)가 가르친 규율에 따라 모범적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이 신께서 보시기에 좋은 무슬림의 삶이다.


 반면, 기타 지역에서는 이슬람이 '꾸란과 하디스의 규율에 따라 사는 평화로운 삶'이라는 보기 좋은 포장의 주입식 종교문화에 각인이라고 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들에게 히잡과 아바야는 여성이 사회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이 아닌 여성의 자유를 억압하는 장애물인 것이다. 자신을 가리고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사회가 은연중에 여성을 수동적인 객체로 치환하게 한 것이다. 또한 여성의 역할을 가정으로 한정하는 이슬람 사회의 가부장적 태도에 대해서도 눈살을 찌푸리곤 한다. 물론 종교 자체에 대한 비난이 아닌 꾸란과 하디스를 해석하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과연 이들의 삶이 진정으로 신께서 원하시는 모습일지 물음표를 던진다.

Untitled (hands) , Digital inkjet print on wove paper, 45.1 x 29.8 cm, 2005

 위와 같은 상반된 시각에서 그의 작품은 극명하게 다른 시각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아랍어와 꾸란을 이해한다면 작품을 볼 때 ‘경건함’이 먼저일 수 있지만, 언어와 종교에 대한 이해가 없이 작품 자체를 바라봤을 경우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느낌은 ‘갈망’일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견해는 필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 담긴 표현으로, 네샤트의 작업 성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작품에 대한 해석은 언제든지 주관적이고 가변적이라는 것만 주장할 수 있을 뿐이다.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는 본인의 저서 <작품에서 텍스트로>에서 "text는 Multiple하다. 텍스트는 의미의 공존이 아닌 통과이며 횡단이다. "고 말한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느 현상에 대해 일부만 인식하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는 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시시각각으로 그에 대한 느낌과 생각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마치 같은 노래를 들어도 그날의 기분에 따라 느낌이 다른 것과 같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가사가 사랑을 잃은 순간에 들으면 행복의 절정을 노래하는 음악은 가장 깊은 절망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이렇듯 네샤트의 작품 또한 경건함이 허무로, 갈망이 억압으로 뒤바뀔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누군가에게는 대자연으로, 본성으로, 아름다움 자체로 느껴질 수 있다. 

 한 가지 그림을 보더라도 수만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듯 아랍어를 모르다고 해서 이슬람 미술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물론 비신론자에게 작품 속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text는 아랍어가 아닌 이외의 것들(가령 색상, 글씨의 굵기, 표정, 전시장의 분위기, 작품의 크기 등) 일 것이다.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작가와 작품 기원에 대해 듣는다고 할지라도 이슬람이라는 Text(기의: 역사, 제도, 문화 등)를 이해하지 않고선 그림에 쓰인 언어와 무슬림 여성과 같은 농도의 해석은 불가능 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작품에서 text를 찾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Multiple한 횡단이고, 그것 자체가 또 다른 Text를 창조해낼 수 있는 시도이다. 실제로 작가는 “예술은 종교와 정치 그 어느 것도 강요할 수 없다.”라고 말한바 있다. 그의 작업 소재가 종교와 정치일 수는 있으나, 의미는 관람자가 찾아내는 것이며 이를 통한 작품의 완성 또한 관람자 본인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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