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세계의 경계에 서면 익숙했던 것도 새롭게 보인다. 보는 방식은 삶의 방식을 닮아 있다.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새로운 삶의 방식의 전주곡이 울리고 있다는 것이다. 경계인은 두 세계에 모두 속하면서, 동시에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다. 경계인은 두 세계를 낯설게 보고 새로움을 발견하며, 두 세계의 사람과 자원들을 연결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경계에 서면, 자신의 삶이 변화할 뿐 아니라 접촉하는 상대의 삶도 변화시킨다. 그리고, 그들의 변화하는 삶 속에서 창조가 싹튼다.
2015년에 나는 서울에서 제주로 이주했다. 이전에도 출장으로 자주 다니긴 했지만 이사한 후 제주는 다르게 다가온다. 새롭게 다가오는 제주는 나 자신의 새로운 발견이기도 하다. 그동안 살아온 서울에서의 삶을, 나 자신을, 익숙했던 것들을 낯설게 하고 있다. 출장이나 여행이 아닌, 그러나 타고난 제주민이 아닌 경계인으로서, 제주의 더 많은 길과 장소를 느린 호흡으로 거닐고 타고난 제주민과, 다양한 경계인들을 만나게 된다.
돌이켜보면 나는 또 다른 영역에서 경계인이다. 10대 초반부터 컴퓨터를 접한 열정적인 세운상가 키드였기에 일찌감치 프로그래머로 진로를 정하고 1990년 서울대 계산통계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이미 10대에 선학습한 덕에 대학에서의 전산학 공부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나의 대학생활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조한혜정 교수님이 설립한 <또 하나의 문화>라는 대안문화 운동 단체였다. 연극창작소모임을 결성하고 베케트와 브레히트를 전공한 영문과 선배와 비트겐슈타인을 전공한 철학과 선배와 함께 예술과 철학 텍스트를 반복해서 읽고 토론하고 창작하는 훈련을 했다. 10대 초반에서 20대 초반까지의 이런 압도적 경험 덕분에 나는 문화예술과 기술 사이의 경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기술을 업으로 삼으면서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을 끊지 않으며 19년간 살았다. 12년전부터 다음커뮤니케이션에서 개발과 서비스 본부장을 하다가 2012년 문화와 공간을 담당하는 경영지원으로 옮기고 주경야독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경영 전문사를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2015년부터 '새로운 연결을 통한 창조의 섬, 제주'라는 비전 하에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 센터장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제주 센터를 하면서 많은 경계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때로는 일부러 경계인을 유발시키기도 하고, 그들을 같은 공간에 두고 실험하기도 한다. 그들의 눈맞음과, 화학적 반응을 기다리는 연금술사의 마음으로. 일례로, 제주 센터에 체류하고 있는 대안연극가 문수호 작가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무대미술을 전공한 후, 체코에 오랜 유학과 활동 끝에 돌아와 홍대 앞에서 체코인형극장 다락극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제주 센터에 지난달부터 체류 중인데, 서울, 체코, 그리고 제주의 경계인으로 살고 있는 셈이다. 그는 제주에 체류하는 동안 돌문화공원 조성에 혼을 쏟아온 백운철 단장을 만나 영감을 나누고, 센터 입주기업이자 제주 신화 캐릭터를 만들고 있는 두잉과 눈이 맞아 재미난 콜라보 실험을 도모하고 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또다른 경계인 Michael Dekker는 고향인 네덜란드를 떠나 9개월간 3개대륙 7개국가를 여행중인 디지털 유목민(digital nomad)이다. 디지털 유목민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이동하면서 원격으로 일을 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전세계 곳곳에 디지털 유목민의 거점들이 형성되어 있는데, Mike는 인도네시아 발리의 예술인 마을인 우붓에 위치한 Hubud이라는 코워킹 스페이스에서 추천을 받아 제주 센터에서 열린 해커톤에 참석하였다. 그는 해커톤 이후에도 센터에 체류하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입주기업의 UX를 멘토링하고 있다. 그는 주중 낮에는 리모트로 일을 하고 틈틈히 제주를 여행하며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리고 있는데, 그동안 한라산을 등반했으며, 천지연 폭포를 방문했으며(그의 친구는 그의 포스팅을 보고 ‘Surreal'하다는 답글을 달았다), 제주 해녀들을 만났다. 그는 훌륭한 사진가이기도 하다. ‘제주 해녀를 존경한다’고 말한 그의 제주 해녀 사진 포스팅에는 많은 그의 (외국인) 친구들이 ‘Like’를 눌렀다. 이렇게 그는 리모트를 자신의 일을 하면서, 제주와 만나고 소통하면서 새로움을 주고 받고 있다.
최근 몇년 사이에 제주는 전국에서 가장 핫한 곳이 되었다. 자발적인 문화이민자와 체류민들, 이전한 하이테크기업들, 그리고 이러한 한국에서 가장 자연과 문화원형을 잘 보존해 온 도민들 등 다양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런 다양성 속에서 모두가 경계인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다양성은 갈등이 될 수도 있고 혁신과 창조가 될 수도 있다. 나 자신 경계인으로서 이들이 연결되고 소통하고 창조하는 과정에 참여하고 지켜볼 수 있는 소중한 시기가 아닐 수 없다. 이 연재를 시작하는 것은, 이러한 참여 관찰의 내용을 기록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새로운 발견을 전달하고, 새로운 기회를 열어줄 수도 있겠다 싶어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문화예술과 기술의 경계인, 서울과 제주의 경계인으로 살아가고 꿈꾸는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 이 소소한 이야기들은 오픈플랫폼, 오픈이노베이션과 같은 기술의 영역과, 인문사회지리학, 예술사회학, 커뮤니티아트, 조직학습, 조직미학, 도심재생 등 문화예술 영역에 여러 링크가 걸릴 것이다. 그 흥미진진한 여정을 함께 가 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