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Connect 매거진 6호(2018년 봄호)에 쓴 글입니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IT개발자 출신으로서 필자는, 그동안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가 성장하려면 수도권에 선택과 집중해야 하고 기술혁신이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을 비판 없이 수용했었다. 그런데, 3년 전부터 제주의 지역 혁신·창업생태계 조성자 역할을 하면서 관점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과연 기술혁신만으로 우리나라가 지속성장할 수 있을까? 수도권 중심의 성장만으로 가능할까? 2000년대 넘어들어 중국이 빠른 추격자(fast-follower) 전략을 우리보다 큰 시장을 기반으로 더 잘 구사하고 있고, 우리나라는 급격한 출산율 감소로 인구 절벽을 앞두고 있다. 대기업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하청 중심의 기업생태계와 생산거점도시는 허무하게 무너져가고 있다. 우리는 어쩌면 죽음에 적응해가고 있는 '뜨거운 물 속의 개구리'일 지도 모른다.
지금이 혁신의 방법을 혁신할 때다. 지난 50여년간 한강의 기적의 고도성장을 이룬 것이 기술혁신과 빠른 추격자 전략이었다면, 앞으로의 지속성장을 위해서는 새로운 전략 프레임이 필요한 할 것이다. 새로운 관점, 사고의 틀로 한 단계씩 들어가보자.
첫번째 관점 전환 - '구분'으로부터 '축'으로
현재 우리나라의 혁신창업을 비롯한 혁신성장 관련 정책은 기술 혁신 중심에 편중되어 있다. 최근 생활혁신이 추가되었다고 한다.
생활 혁신성장은 라이프스타일 혁신성장으로 부를 수도 있다. 그런데, 기술과 생활이 반대말인가? 뭔가 이상하다. 다르게 생각해보자. 기술 혁신과 라이프스타일 혁신을 두개의 축으로 놓아본다.
이러면 4개의 면이 생기게 된다. 많은 것이 설명이 된다. 이렇게 구분이 아닌 축의 관점으로 보게 되면, 융합의 영역이 보이게 된다. 라이프스타일 혁신과 기술 혁신이 결합된 것은 애플과 아이폰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라이프스타일 혁신이면서 비기술 혁신은 스타벅스, 홀푸드를 들 수 있다. 기술 혁신이면서 라이프스타일 혁신이 아닌 것은 삼성반도체, LG디스플레이를 들 수 있다.
우리나라는 라이프스타일 혁신이 부족한가. 한류 등을 보면 가능성이 없진 않다. 진짜 부족한 건, 그동안 관점 때문에 보지 못한 다른 한 축이다.
두번째 관점 전환 - '지역'의 발견
시점을 우상단으로 45도 옮겨서 보면 숨어 있던 지역 혁신의 축이 보인다.
우리나라는 50여년간 '한강의 기적'을 통해 수도권에 인재와 산업을 집중시키는 방식으로 단기 고도성장했다.
지역 혁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역을 선정하여 탑다운으로 기술혁신, 생산 기지화했던 것이고 지역 고유의 아이덴티티에 기반한 자생적 라이프스타일이 결합된 혁신은 부족했다. 서울 지상주의, 지역 생산기지 지상주의로 인하여 오히려 이전에 있었던 지역의 아이덴티티조차 주변화되어 침체되거나 사라져갔다.
이 세 개의 축은 각각 고유의 성장 동력을 가지고 있다. 어느 하나가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하자. 각각 혁신성장의 속성이 다를 뿐이다.
혁신이 세가지 축 중 어디에 해당하는지 판별의 기준은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기술 혁신(x축) : 기술을 통해 효율성을 극대화하며 양적, 질적 경쟁력을 확보해 성장할 수 있는가?
라이프스타일 혁신(y축) :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에 기반하고 그것을 선도하며 성장하는가?
지역 혁신(z축) : 지역의 아이덴티티를 바탕으로 하고 그 아이덴티티 강화에 도움이 되는가? 이를 통해 타지역이 카피할 수 없는 차별화된 경쟁력을 가지는가?
세 개의 축의 성장 동력은 무엇인가? 기술 혁신은 상승력(스케일업)이 뛰어난 반면 생산수단의 카피와 결과물의 복제가 쉬워서 무한 속도로 끊임없이 경쟁자와 싸워야 한다. 라이프스타일 혁신은 사람들의 문화에 기반하므로 추종자가 나오면서 확산되는 전염성이 강하다. 지역 혁신은 도시의 아이덴티티에 기반하므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 타지역에서 카피하기 어렵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기술 중심의 혁신 성장 전략을 펴 오면서 다른 축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해왔다. 그러다보니 각각의 축의 장점을 다 살리기도 어려웠고, 세 개의 축 간의 융합 또한 일어나기 어려웠다.
지난 50여년간의 기술 혁신 중심의 성장전략을 펼친 게 틀렸던 건 아니다. 시대가 바뀌었을 뿐이다. 빠른 추격자(fast-follower) 전략을 통해 선진국의 기술을 따라가고 대량생산 시스템을 구축할 때,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가구의 소비력이 꾸준히 증가할 때는 이 전략이 맞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인구 절벽을 앞두고 있고, 빠른 추격자의 입지를 중국에 빼앗긴지 오래다. 무한 카피가 가능하고 무한 속도의 경쟁이 속성인 기술 영역에서의 성장만으로 우리의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
세번째 관점 전환 - 다양성과 융합으로
앞으로 우리나라의 지속성장을 위해서 혁신의 세 가지 축을 골고루 상황에 맞게 활용하는 혁신 전략을 펼 것을 제안한다. 이들 세 축들을 결합하면 2x2x2=8개(O, X로 나누었을 경우) 또는 3x3x3=27개(상·중·하로 나누었을 경우)의 면이 나온다.
이 소고에서는 모델을 단순화하여 8개의 면으로 살펴보자. 라이프스타일을 S(LifeStyle), 기술을 T(Technology), 지역을 R(Region)로 보고 다음과 같이 8개의 면으로 나누어보았다.
여기서 좌하단의 X면은 비기술X비라이프스타일X비지역의 영역으로 혁신성장의 불모지이다. 그 분면은 제외한 나머지 7개의 면은 각각 의미 있는 혁신성장의 전략지이다. 우리나라는 지역 바깥쪽의 세 영역(T, S, TS), 그 중에서도 기술혁신에 집중해왔다.
해외의 경우는 지역혁신과 결합한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며 지속성장을 이루어낸 사례들을 찾을 수 있다. 지역 기반의 유기농 식품 매장인 홀푸드의 경우 지역 기반 라이프스타일 기업으로 창업해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근래에는 아마존에 인수되면서 지역 기반은 약화되며 기술기반 라이프스타일 회사로 변화하고 있다. 나이키는 포틀랜드의 아이덴티티와 시너지가 나면서 성장하는 지역 라이프스타일 기반 글로벌 기업으로 볼 수 있으며, 나이키 앱 등을 통해 기술 역량까지 강화하면서 지역, 기술에 기반한 라이프스타일 기업(TSR)로 이동하고 있다.
오클랜드에서 시작한 블루보틀은 50여개의 커피매장을 가진 업체이지만 트위터 공동창업자 에반 윌리엄스, 워드프레스 공동창업자 멧 멀렌워그 등 개인투자에 이어 구글벤처스로부터 2,000만달러를 투자받으며 7천억원 가치의 기업으로 성장한 스타트업이다. 블루보틀은 구독(Subscription) 서비스를 통해 2주 안에 갓 볶은 품질 좋은 커피를 전세계 커피애호가에게 공급하고 있다. 또한, "Coffee Brewing Guides”를 발간하고 커피 관련 교육 영상을 "Skillshare”에 업로드하며 각종 커피 이벤트들을 꾸준히 개최한다. 세가지 축의 혁신역량이 함께 어우러져 지역의 아이덴티티와 라이프스타일의 확산성과 IT서비스가 가진 스케일업을 모두 활용한 신종 사례로 볼 수 있다.
홀푸드는 훌륭한 지역기반 라이프스타일 매장이었지만 홀푸드 스스로가 IT의 역량을 갖추었다면 아마존에 인수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존의 인수로 인하여 세가지 영역이 융합된 기업이 될 수도 있고 기존의 본질이 약화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 가지 축의 혁신성장을 위해 필요한 변화
지금까지 간략히 혁신성장을 위한 세가지 축과 그 결합 모델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 모델은 다음과 같은 곳에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스타트업 : 지속성장 가능한 혁신 전략 수립. 이게 맞게 조직 역량 강화, 경영 혁신 등.
엑셀러레이터 : 가능성 있는 스타트업들을 발굴하여 그들을 새로운 축으로 전략 유도하여 엑셀러레이션 등.
정책가 : 정책가가 현재의 혁신성장 정책을 매핑해보고 한계 지점을 발견하고 개선의 가능성을 찾기 등.
연구자 : 연구 영역간의 칸막이를 넘어서서 다학제적 연구를 하고, 지역 현장에 기반한 연구 등.
지역혁신의 중요성은 여러 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정권교체가 일어났음에도 혁신센터는 지역발전의 거점으로서 지역혁신허브의 기능이 더 강화되고 있다. 소셜벤처, 도시재생스타트업 등 다양한 지역혁신 스타트업들이 생겨나고 청년 인재들이 지역에 주목하고 있다.
오랜 기간 수도권 집중으로 인하여, 지역혁신의 필수 요소인 경제, 지식, 정책, 언론의 지역혁신 플랫폼들이 허약한 상태다. 여기에 열매가 열리길 바라며 섣불리 자금 중심만의 육성책을 펼치면 잡초만 자라고 자생적 혁신 기반의 씨앗이 죽는다.
지역 현장에 기반한 혁신가들의 사회적 자본의 구축이 혁신 생태계의 최우선 선결 과제다. 제주혁신센터는 올 가을 지역혁신·창업생태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경계를 넘는 연결과 융합의 장인 J-Connect Day 2018을 마련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다양성, 개방성, 자율성이 있는 건강한 지역혁신 네트워크 구축을 하여 지역혁신의 축과 라이프스타일의 축, 기술의 축이 융합되어 다양한 창조적 혁신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