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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의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by 요우


2025년 8월 13일. 그러니깐 글을 작성하는 시간 기준으로 어제 외할머니 황옥자의 49제였다.

49일 전이던 2025년 6월 24일 20시 27분이 외할머니가 우리 곁을 떠난 시간이다.


아직도 안동에 가면, 외할머니가 살던 주공아파트에 외할머니가 있을 것만 같다.

외할머니 돌아가신 그날, 혼자서 외할머니 집에 들러 그곳에서 잠을 청한 것은 잘했던 것 같다.

이제는 갈 수 없고, 보지 못할 그 공간에서 외할머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돌아본다.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를 화초들이 정성스레 가꾸어져 있었고,

어느 순간 어떤 자식이나 손주가들이 올지 모르지만,

냉장고와 김치 냉장고에는 우리에게 줄 음식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외할머니 떠나시던 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나와 외사촌동생은 급하게 안동으로 출발했다.

안동에는 빠르게 도착했다. 그곳에서 엄마의 연락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마지막 떠나시는 길을 보지 못하면, 평생 한으로 남을 것만 같아서

외할머니 계시는 칠곡 경북대병원으로 가겠다고 떼를 썼다.

그 와중에 사소한 엄마와 마찰이 있긴 했지만, 그때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한번 더 고비를 넘겼고, 나와 사촌동생이 칠곡까지 갈 수 있는 시간을 주셨다.


어떻게든 한 명의 가족이라도 더 보고 떠나고 싶으셨던 걸까

오전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던 외할머니는 결국 한참을 더 의식을 잡고 계시다가,

나와, 이후에 도착한 막내 외삼촌과 그 가족을 다 보고 한두 시간 후인 20시 27분에 떠나셨다.


아직도 마지막으로 지켜봤던 모습이 떠오른다.

간호사가 얘기한다. 말씀은 못하시만 지금 다 듣고 계시다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지금 다 하시라고.


집중 치료실로 들어가 외할머니의 손을 붙잡고 얘기한다.

부모님 대신 키워줘서 감사하다고,

그동안 나 밥해먹이고, 평생 동안 챙겨주어 고맙다고,

외할매 없었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클 수 있었겠냐고,

나 이제 안동 오면 누가 나한테 밥 먹으라고 잔소리하나

외할매 만든 식혜나 감주 먹고 싶으면 이제 어떡하지?

손주며느리 그렇게 얘기했는데, 할매 소원 못들어줘서 어떡하지?

앞으로 다시는 하지 못할 말들을 내뱉으며,

내 두 눈에서 눈물을 펑펑 쏟으며,

마지막으로 속절없는 이야기도 해본다.


더 많은 사랑을 드렸어야 했는데, 왜 그러지 못했을까

외할머니와 같이 찍은 사진이 거의 없다는 것이 한스럽다.


2016년의 가을. 남대문에서 나와 외할머니




외할머니가 떠나시고, 엄마가 그렇게까지 무너지는 것을 평생 처음 보았다.

외할머니가 병원에 계시고, 계속해서 간병하셨던 엄마는 결국 외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외할머니 떠나시고, 엄마와의 통화에서 엄마는 나라도 임종을 지켜봤으니 되었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무너져계셨다.


그 안동교회 앞에서, 외할아버지와의 합장을 위해 관련 서류를 기다리는 동안

나와 엄마는 작은 언쟁이 있었다.

외할아버지 때의 일을 또 반복할 것이냐고,

언제까지 나도 이렇게 지내야 하냐고, 살면서 처음으로 엄마에게 소리를 질렀던 것 같다.


사실 정신이 없던 터라, 나도 그 기억이 선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분명히 엄마는 나로 인해 한번 더 무너져버렸고, 이 기억 역시 나는 평생 들고 가지 싶다.

외할머니 돌아가신 첫날은 외할머니 때문에 울었지만,

그 이후로는 엄마 때문에 더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외할머니에게는 6명의 자식이 있었다.

첫째부터 셋째까지는 모두 딸이고, 넷째부터 막내까지는 모두 아들이다.

그 육 남매가 장례식장까지 투닥거리는 모습이, 아래 항렬인 내가 봤을 때도 기가 찬 모습이었지만,

그분들도 그들의 역사가 있었으니 감히 나설 수도 없었고, 엄마도 원하지 않았다.

어떤 순간들에서는 몇 번이나 욱한 성격이 올라올 뻔한 적도 있었지만,

그들도 지금 얼마나 슬프고 복잡한 마음일까.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서른 중반이 되니 이제는 죽음과 그렇게 멀지도,

그렇다고 엄청 가깝지도 않은 그런 모호한 나이가 되었다.

누군가 떠나간다는 게 아직은 너무나 낯설지만,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그런 애매한 어른이 되어간다.


가족 중 누군가 최초로 떠나간 것은 16세 중학생였다.

친할머니였다. 하지만 너무 어렸고,

그때의 짧은 삶 속에서 친할머니를 뵌 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큰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애매하게 남은 슬픔과, 친할머니가 투병할 때 방문한 병원에서의 기억만큼은 분명하게 남아있다.


그다음은 24살 때의 외할아버지였다.

그때는 복잡한 개인사로 인해, 장례식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 상실감과 억울함에, 너무나 슬프고, 서러웠던 기억이 1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군대를 막 제대하고 대학교 앞 원룸에서 속절없이 슬퍼하며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먼 길 떠나시는 길 배웅하지 못했던 그때의 기억이 평생 남아있다.


이제 더 이상 내게 남은 조부모님은 없다.

그럼에도 남은 사람들은 이런 기억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어디선가 그런 글귀를 읽었다.

우리에게 생명은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다.

생명이란 원래 이 세상에 있었고, 우리는 잠시 그 생명을 빌리고 있을 뿐이라고,

그리하여 언젠가 그 생명을 다시 되돌려 주어야 하는 때,

너무 슬퍼하지 말고, 그동안 잘 쓰다 간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외할머니도 본인에게 부여된 생명을 잘 사용하시다 떠나셨다.


나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산자의 시간은 이 순간에도 속절없이 흘러만 간다.


할아버지, 할머니. 나중에 뵈어요.


2025년 8월 14일. 초안을 작성하다.
2025년 10월 20일. 도저히 다시 잘 읽히지 않는 글을 겨우 발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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