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in 1991/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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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스로 사람을 잘 판단한다는 오만에 빠진 채 살아왔다. 판단의 근거라고 해봤자 첫인상과 옷매무새, 짧은 몇 분의 대화임에도 불구하고 선입견을 가지고 상대방을 내 멋대로 규정지어버리곤 했다. 한번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판단되면 다시는 그 사람을 알아가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고, 먼저 다가와도 굳이 마음을 열지 않았다.
이러한 내 오만한 태도는 스무 살 후반이 될 무렵까지도 완전하게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는, 한번 멀리한 사람은 절대 가깝게 지내지 않아서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아~ 역시 내가 옳았어!’라고 생각하며 나만 모르는 스스로의 악순환에 빠졌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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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일곱. 입사 초반에도 역시나 나만의 기준으로 동기들을 멋대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첫 사전모임에서, 첫 교육에서, 첫 점심시간, 첫 회식에서 내 머릿속은 마치 옷장을 정리하듯 버릴 옷, 입을 옷 들을 골라내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 일단 퇴근하고 내일 와서 하면 안 돼?”
키는 158센티미터 정도에 하얀 피부를 가진 그녀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아주 ‘삐딱’하게 내뱉은 한마디에 나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은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신입사원 교육의 일환으로 발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 팀은 물론 다른 팀들조차 발표 준비에 한창이었고, 칼퇴는 암묵적으로 포기한 상황이었다. 이것이 내 기억 속 그녀의 첫마디였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는 몇 초 만에 버릴 옷으로 분류되어 의류수거함으로 향했다.
그 이후로도 그녀의 삐딱한 행동은 계속되었다. 신입사원이라면 어느 정도 회사의 눈치를 봐야 빨리 적응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그녀를 의류수거함으로 보내버린 것이 아주 잘한 행동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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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덟. 그날은 설 연휴를 맞이하여 일찍 퇴근을 하게 되었다. 할 일이 없던 나는 동기 단톡방에 한잔 할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답이 없던 그때, 저기 멀리 의류수거함 속에 들어있던 그녀가 튀어나온 것이다.
“나! 나 술 마실래!”
“으응..?”
전혀 내 예상에 없던 상황이었다. 입사 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녀와는 카톡 몇 마디 외에는 딱히 소통을 해본 적도 없었으며, 단 둘이 술을 마신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어색해서) 잠시 동안 고민을 했다. 미안하다고 다음에 먹자고 할까? 아니, 내가 먹을 사람 찾아놓고 이제 와서 그럴 순 없지…
그렇게 시작된 술자리는 놀랍게도 점심부터 막차시간까지, 약 10시간 동안 이어지게 되었다. 그 술자리는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녀는 내 주변 어떤 누구보다도 공감 능력이 뛰어났고, 또 의리가 넘치는 사람이었다(나중에 그녀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나는 내가 갖고 있던 그녀에 대한 편견이 오해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인생 처음으로 의류수거함에 버려둔 옷을 다시 꺼내 옷장에 가지런히 걸어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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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조로웠던 내 옷장 속에 평소 입지 않던 옷 하나가 들어온 순간, 나의 생각에는 아주 큰 변화가 찾아왔다. 나는 그동안 옷장이 꽉 찼다는 핑계로 헌 옷들을 버릴 생각만 했었다. 하지만 헌 옷들을 버릴 필요 없이 내 옷장의 크기를 늘리면 되는 거였구나(돈 드는 일도 아니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내 옷장의 크기를 무한대로 늘려 보기 시작했다.
스물아홉. 옷장의 크기를 키우고, 옷을 다양하게 구비하는 일은 생각보다 꽤 고난도였다. 새롭게 들어오는 옷들에 거부감을 보이며 텃세를 부리는 기존의 옷들, 옷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도망가는 옷,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그런 옷들까지.. 겨우겨우 구비해 놓고 나면 관리방법도 제각각이라 단독세탁부터 물 온도 조절에, 세제까지 따로따로 신경 써줘야만 옷장 속의 평화가 유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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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서른. 스물여덟 때 내 옷장의 구성을 바꿔버린 그녀는 내가 우왕좌왕 옷장을 관리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관리법까지 떠먹여 주게 된 일이 있었다. 그녀가 주최한 작은 사진전에 나를 초대해준 것이었다. 내 옷장이 아닌 그녀의 옷장 속에 들어가 본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다양한 시선을 지닌 옷들이 서로 귀 기울이며 조화롭게 각자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굳이 옷들을 서로 맞추며 관리할 필요 없이, 각자 가진 개성을 존중하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두면 된다는 것을. 그러면 자연스럽게 옷장의 평화가 찾아온다는 것을.
그렇게 서른하나를 보내고 있는 나는 더 이상 옷장 관리도 의류수거함도 필요 없는 사람이 되었다. 내 머릿속 지독한 편견을 없애준, 그리고 나의 옷장을 다채롭게 채워준 그녀에게 감사함을 전하며 서툰 글을 마친다.
30±1,
[이제 의류수거함은 필요 없어]
Written by LEE JIUNG
@lee._.jiung
이지웅, born in 1991/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