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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새롬 Aug 02. 2018

#112.파리에서 만난 그녀, 아멜리에

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프랑스 #파리 #생투앙벼룩시장  

#영화 #아멜리에 #오드리토투 

#몽마르뜨언덕 #라팽아질 

#2017년10월21일 


<손때묻은 물건들에 어떤 사연이 깃들어 있을까?>

 낡았지만 정성스레 손질된 물건에는 우아한 멋이 있다. 그래서 나는 시간과 이야기로 겹겹이 덧대어진, 어쩌면 조금은 촌스러울지도 모를 오래된 물건에게서 매력을 느낀다. 한 번은 서랍을 정리하다 낡은 수첩 하나를 발견한 일이 있었다. 나와 사회생활을 함께 시작했던 물건이었다. 버린 줄만 알았던 수첩은 표지를 어루만지는 것만으로도 그때의 알싸한 기분으로 나를 이끌었다. 오래된 물건만이 갖는 오묘한 능력이었다. 

<가끔은 무서운 것도 있다>

 전날 내린 가을비로 한층 깊어진 파리의 아침, 우리는 누군가의 기억이 담긴 물건들을 둘러보기 위해 외곽에 위치한 생투앙 벼룩시장을 방문했다. 흐린 날씨에 이른 시간이라 아직 문을 연 가게들이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거리에는 세월의 흔적을 그리고 누군가의 사연을 깊게 간직한 물건들이 충실하게 제 몫을 다하고 있었다. 이런 물건을 사가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 것들도 어김없이 좌판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컬러 팡팡 빈티지 의상집>

 정갈하게 세탁된 빈티지 의류들은 이국적인 파리의 분위기만큼이나 독특한 디자인을 뽐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지 따듯해 보였다. 그간 얇은 옷을 여러 벌 겹쳐 입는 것으로 잘 버텨왔는데 비가 오고 기온이 뚝 떨어지니 저런 따듯한 옷들이 더욱 간절하게 느껴졌다. 그래, 결심했어! 벼룩시장에서 따듯한 옷 한 벌씩을 사는 거야! 

<쇼핑을 위한 딱 맞는 핑계, 추위!>

 원래부터 빈티지룩을 좋아하는 나는 추위도 잊은 채 열심히 옷을 골랐다. 컬러풀한 져지부터 패턴이 특이한 원피스까지 사고 싶은 것들이 레이더에 쏜살같이 걸려들었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미션은 ‘따듯한 옷 한 벌’이 전부였다. 잠시 마음이 좌로 90도 우로 90도씩 흔들렸지만, 갑자기 훅하고 불어온 찬바람에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두터운 점퍼 하나를 골라 들었다. Schottd의 항공점퍼. 투박하지만 스타일리시해서 득템이라 생각하고 샀는데, 막상 입고 다니다 보니 자꾸 공장 작업복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추위를 피하는 것은 성공했으니 다행이었다. 

<파리의 빈티지샵은 득템의 성지>

 남편은 감성 돋는 빈티지샵 앞에서 체크무늬 코트와 붉은색 캐시미어 머플러를 40유로에 샀다. 맨날 밀리터리 무늬가 들어간 경량 패딩만 입다가 코트에 머플러까지 두르니 사람이 달라 보였다. 역시 옷이 날개다. 

 이렇게 생투앙 벼룩시장은 방심하는 사이 가진 돈을 몽땅 탕진하게 만드는 소품들로 가득했다. 한판을 통째로 가져가고 싶은 아기자기한 뱃지부터 1930년대 발행된 보그 잡지, 뽀시래기 시절 강제 소환하는 장난감들까지. 하지만 여기에서 가장 큰 함정은 우리에겐 탕진할 돈이 없다는 사실. 그래도 옷 한벌씩은 사 입었으니 그것으로 만족이었다.  

<붉은 풍차라는 뜻의 물랭루주>

 점심 무렵 시장 구경을 마치고, 지하철에 올라 블랑슈 역까지 이동했다. 처음에는 파리의 지하철이 지저분하고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조금 겁이 났었다. 하지만 막상 와보니 생각보다 더럽지 않았고, 우리는 가진 게 없어 보였는지 아무도 털어가려 하지 않았다. 물론 가방을 앞으로 메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탓도 있겠지만 말이다. 

<아멜리에 역할에 특화된 여배우 오드리 토투>

 지하철역 밖으로 나오니 오전 동안 꾸물거렸던 하늘이 차차 개고 있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거리를 걸었다. 이 설렘의 근원은 프렌치 캉캉춤으로 유명한 댄스홀 물랭루주도 파리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몽마르뜨 언덕도 아니었다. 장 피에르 주네 감독 특유의 위트와 색감이 사랑스럽게 표현된 영화 ‘아멜리에’. 바로 그 영화 속 주인공 아멜리에가 일하던 카페가 이 거리 어딘가에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영화 속 카페의 모습>
<실제로 만난 카페의 모습>

 ‘카페 데 두 믈랑 Café des 2 moulins’. 붉은색 문을 밀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노란 조명과 반짝이는 금빛 Bar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틈새로 검고 짧은 머리를 한 아멜리에가 언뜻 스쳐갔다.

 우리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조그마한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크림 브륄레를 주문했다.

<아멜리에가 좋아하는 티스푼으로 크림 브륄레 표면 톡톡 깨기>
<주문한 크림 브륄레 받아들고 행복에 취하는 중>

 설탕을 녹여 반들반들 코팅한 표면을 작은 티스푼으로 톡톡 깬 뒤 그 속에 담긴 부드러운 크림과 함께 담뿍 떠 입안에 넣으니 오전 동안 몸에 든 한기가 순식간에 사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크림 브륄레 표면을 톡톡 깨는 행위는 아멜리에가 좋아하는 일중에 하나이기도 한데, 그녀는 이렇게 귀여운 취미를 꽤나 많이 가지고 있었다.

<소소한 아멜리에의 취미가 사랑스럽다>

 운하에서 물수제비 뜨기, 영화관에서 다른 사람 얼굴 관찰하기, 식료품점 곡식 자루에 스윽 손가락을 넣기, 모두 소소하지만 확실히 행복해질 수 있는 그녀만의 비법이 분명했다.

 그래서 이번엔 카페를 나와 아멜리에가 매일 들르던 식료품점을 찾아갔다. 채소와 곡식을 진열해 두던 녹색 진열대가 영화 속 모습과 꼭 닮은 그곳에서 나는 점점 현실과 영화의 경계가 희미해짐을 느꼈다. 곡식 자루가 있었다면 나처럼 찾아와 손가락을 넣어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 때문에 남아나질 않았겠지.

<반 고흐가 머물렀던 파란 대문 집>

 우리는 신비로운 아코디언 연주가 담긴 아멜리에 OST를 들으며, 시간의 반복으로 반들반들해진 돌길을 걸었다. 19세기 후반 몽마르뜨 언덕 주변은 자유로운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보헤미안풍의 마을이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화가 반 고흐도, 괴짜로 소문난 피카소도 이곳에 머물며 삶의 고독과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아냈다. 잠시지만 아주 낭만적이게도 그들과 이 길을 함께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 들뜬 마음으로 고흐가 머물렀던 파란 대문 집도 지나고 아멜리에를 촬영했던 극장 앞도 지났다.  

<지금은 많이 상업화 된 테르트르 광장의 풍경>

 ‘테르트르 광장 Place du Tertre’에 다다르니 수많은 화가들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관광객들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온몸에 청동색 물감을 칠하고 퍼포먼스를 하는 예술가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완벽한 프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무리들 사이를 빠져나와 몽마르뜨 언덕의 꼭대기로 향하니 햇살 아래 반짝이는 새하얀 사크레쾨르 성당이 나타났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사크레쾨르 성당 앞 계단>

 우리는 성당 앞 계단에 앉아 잠시 오래된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파리의 가을에 노을이 스미고 있었다. 그 아래로 어떤 이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했고, 어떤 이는 맥주를 팔았다. 눈 앞에 펼쳐진 제각기 불규칙한 모든 것들이 아름다웠다.  

<아멜리에 영화 속 성당과 회전목마>
<날씨는 흐렸지만 몽환적인 분위기는 여전했던 장소>

 아멜리에가 니노에게 자신의 존재를 처음 알렸던 장소도 이곳 몽마르뜨 언덕이었다. 몽환적인 분위기의 회전목마가 현실을 단숨에 영화 속으로 끌고 들어가 버리면 그저 그 힘에 마음과 시간을 맡길 수밖에 없는 곳. 현실로 다시금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도 모두 포기하게 만드는 그런 곳은 오직 파리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빈티지한 네온 안내판이 매력>

 밤이 오기 전 게스트하우스에 돌아가 저녁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우리는 다시 차가운 파리의 밤거리로 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도착한 곳은 몽마르뜨 인근의 ‘라마르크 역 Lamarck – Caulaincourt’. 오래된 시간의 흔적을 입은 가로등이 어둠 속에서 역으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영화에서 아멜리에는 눈이 보이지 않는 할아버지에게 거리의 풍경을 생생하게 설명해주고는 역 옆으로 난 저 계단을 유유히 뛰어올라갔었다.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아름다운 색감과 경쾌한 노래가 화면 가득 자리했던 잊지 못할 장면 중 하나였다.

<영화 속에서도 등장하는 빈티지 안내판!>

 하지만 몽마르뜨를 다시 찾은 이유가 그녀의 흔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곳이 처음 예술가들의 마을이 되었던 그때, 매일 저녁 해가 져야만 해가 뜨는 공간이 있었다. 다양한 예술을 선보일 수 있는 무대를 가진 선술집 ‘카바레 Cabarett’. 그들은 이곳에 모여 밤이 질 때까지 예술을 논하고, 사람과 사랑과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래서 나는 이 꿈만 같은 하루의 마지막을 그곳에서 보내고 싶었다.     

<빠른 토키라는 뜻의 라팽 아질>

 19세기 몽마르뜨 주변에는 이런 카바레들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여전한 인기를 자랑하는 물랭루주도 1889년에 문을 연 카바레이다. 하지만 우리가 찾아간 곳은 간판에 토끼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유명한 ‘라팽 아질 Lapin Agile’이었다. 피카소의 그림 ‘라펭 아질에서’에 등장하는 바로 그곳이다. 20세기 초 물랭루주만큼이나 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았던 장소에 가게 되다니. 꿈같은 하루의 정말 꿈같은 밤이었다.

<1미터 앞에서 듣는 재즈 라이브>

 붉은 조명이 낮게 드리운 작은 가게 안에 옹기종기 사람들이 모여 앉기 시작했다. 우리는 낡은 피아노 옆자리를 안내받았다. 자리에 앉자 테이블 위로 향이 좋은 체리 와인 한잔씩이 놓였다. 연주자가 피아노 앞에 앉아 뭉근한 재즈 몇 곡을 연주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중앙 테이블에 앉은 이들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대화를 나누듯 시대를 풍자하듯 사랑을 나누듯 샹송들이 이어졌다. 누군가는 기타를 들고 나와 노래하고, 누군가는 애절한 반도네온 소리에 맞추어 노래했다. 아는 불어라고는 인사와 감사뿐이었지만 ‘에디트 삐아프 Edith Piaf’가 서있던 그 장소에서 그녀의 노래를 들으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9시부터 시작된 공연은 새벽이 되어야 끝이 나지만 우리는 숙소로 돌아갈 차편이 끊기기 전에 일어나야만 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가게를 나서는데 에디트 피아프의 ‘아니요,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 Non, Je Ne Regrette Rien가 들려왔다. 제일 좋아하는 곡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떠나는 그 마음이란. 언젠가 꼭 다시 파리에 와 몽마르뜨 근처에 숙소를 잡고 공연이 끝나는 시간까지 이곳을 지키리라 다짐했다.

<손님처럼 앉아 있다가 노래를 시작하는 샹송 가수들>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가니 시간이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미 잠든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 대충 세수만 하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기억이 나진 않지만 밤새도록 기분 좋은 꿈을 꿨던 것 같다. 아마 아멜리에와 고흐를 만나 함께 카바레에 가지 않았을까. 해가 뜰 때까지 밤을 지새우며 함께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  


Non, Rien De Rien,
Non, Je Ne Regrette Rien

Car Ma Vie, Car Me Joies

Aujourd'hui Ca Commence Avec Toi


아니에요, 그 무엇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나의 삶, 나의 기쁨이
오늘 그대와 함께 시작되거든요! 


-에디트 피아프의 '아니요,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의 마지막 가사


에디트 피아프 노래 들어보>

https://www.youtube.com/watch?v=Q3Kvu6Kg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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