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유럽여행 #프랑스 #파리 #베르사유
#영국 #런던 #버스이동 #가족
#2017년10월22일~23일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날은 유난히 추위가 부지런을 떨던 그런 날이었다. 가진 옷을 모두 껴입고 아침 일찍 기차에 올라 외곽에 위치한 베르사유 궁전에 들렀다. 사람들은 이른 아침부터 중세 귀족들의 사치스러웠던 과거를 엿보기 위해 궁전 앞에 줄을 섰다. 우리도 그 줄의 꼬리쯤에 서서 1시간 반쯤을 추위에 떨며 기다려야 했다.
고생을 견디고 들어간 궁은 말 그대로 화려했고 사치스러웠다. 평범한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던 시절, 귀족들은 이곳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파티를 벌였다. 이렇게 겉치장이 중요했던 귀족들이었지만 이상하게 화장실 문화가 없어 아무 곳에나 용변을 해결하곤 했단다. 그런 상황에서 매일매일 수십수백 명의 사람들이 파티에 참석했으니 오죽했을까. 결국 궁전은 오물로 뒤덮여 잠시 폐쇄를 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환경 덕분에 하이힐과 향수가 발달되었다고 하니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은 셈이 되는 것인가.
봄이었으면 생기가 넘쳤을 정원은 유난히 좋지 않은 날씨 덕에 으스스해 보였다. 우리는 칼바람이 몰아치는 정원 앞에서 게스트하우스 이모님이 싸주신 토스트를 당차게 먹어치우고 깔끔하게 뒤돌아 그곳을 나왔다. 생각보다 심심하게 끝난 베르사유 구경.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하철 역에서 산 따끈한 크로와상을 뜯어먹으며 어쩌면 부귀영화라는 게 이렇듯 겉으로 보기엔 화려하나 실상은 심심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인생에 한 번쯤은 부귀영화에 흠뻑 취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함께 말이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파리에서의 깨알 같은 추억을 배낭 속에 차곡차곡 담아 넣고 영국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영국은 섬나라지만 유럽 대륙과 무려 해저터널로 연결되어 있어 버스나 기차 이동이 가능했다. 기차는 '유로스타 Eurostar'라고 불리며 2시간 30분 정도면 파리에서 런던까지 이동할 수 있고, 가장 저렴한 표가 45파운드(약 65,000원)로 비싼 편이었다. 반면 버스인 '유로라인 Euroline'은 29유로(약 37,600원)로 경제적이었지만 파리에서 영국까지 7시간 15분 정도가 소요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돈보다 비교적 시간이 많은 우리의 선택은 당연하게도 버스였다.
인터넷으로 예약한 표를 살펴보니 꼭 30분 전에는 터미널에 도착해 체크인을 하라는 안내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 여유 있게 터미널에 도착해 대기를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술술 풀리는 듯했다. 하지만 체크인 창구가 열리던 순간 뜻밖에 헬게이트도 함께 열려버리고 말았다. 직원에게 미리 저장해 온 모바일 티켓과 여권을 내밀었더니 이거 말고 종이로 된 티겟을 달라는 것이었다. 응? 프린트 안 해왔는데! 순간 등 뒤로 식은땀이 쪼르르 흘러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직원은 이런 일이 자주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터미널 한쪽 구석에 있는 컴퓨터를 이용해 프린트를 하라고 알려주었다. 버스 출발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단 10분! 그녀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그때부터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컴퓨터 키보드와 기본 언어 설정이 프랑스어로 되어 있어 메일함에 로그인하기도 쉽지 않았다. 가까스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넣으니 무슨 인증을 해야 한다는 안내창이 떴다. 그 와중에 우리와 같은 사정의 미국인이 내 뒤에 줄까지 섰다. 으아! 압박과 긴장과 식은땀이 3중 콜라보로 정신을 압박해 왔다. 나는 더 이상 가망이 없음을 직감하고 미국인 여행객에게 컴퓨터를 내주었다. 하지만 그도 결국 성공하지는 못했다. 결국 간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탑승 시간을 넘기고야 말았다. 허무함이 토네이도처럼 온몸을 휘감던 그때 한줄기 희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Just go!
그냥 가!
물론 직원의 표정이 '너희 정말 노답이구나'에 가까웠지만 퉁명한 그녀의 손끝에 체크인이 완료된 티켓이 들려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티켓을 받아 들고 고맙다는 인사를 남긴 뒤 우사인 볼트처럼 계단을 뛰어올라 탑승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출발 직전의 버스를 붙잡아 짐을 싣고 자리에 앉았다. 와... 탔네 탔어.
가까스로 탑승에 성공한 버스는 사람들을 싣고 한참을 달리다 어느 낯선 공간에 멈추어 섰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해저터널을 지나는 기차 안이었다. 즉 버스를 타도 결국은 그 버스를 기차에 싣고 이동해야 한다는 사실. 그렇게 우리는 버스로 기차를 타는 요상한 경험을 거쳐 영국 땅에 도착했다. 이곳에 오기 전 나는 영국도 유럽연합(EU)의 회원국이니(비록 탈퇴 절차를 밟고 있지만) 당연히 쉥겐 조약에 가입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수많은 나라로 이루어진 유럽이란 대륙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한 곳이었다. 영국은 유럽연합(EU) 회원국이지만 통화도 유로가 아닌 파운드를 사용하고, 쉥겐 조약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쉥겐이란 국경에서 검문이나 여권 검사 등을 생략하여 각 나라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하는 조약인데, 사실 유럽연합 회원국이 아니더라도 스위스,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등은 쉥겐 가입국에 해당한다. 또 반대로 영국, 아일랜드,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등은 유럽연합 회원국이지만 비쉥겐 국가이다. 아오 복잡해. 그래서 오늘의 결론은 영국은 비쉥겐 국가이니 다른 유럽의 국가들에서 이곳에 가려면 입출국 심사를 반드시 거쳐야 하고, 버스를 탈거라면 꼭 티켓을 프린트하라는 것이다.
오후 4시쯤 '빅토리아역 Victoria Station' 근처 터미널에 내려 유심과 교통 카드를 구매 한 뒤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숙소를 찾아 나섰다. 도심에서 지하철로 약 30분 정도 소요되는 곳에 위치한 이번 보금자리의 숙박비는 2인 하루에 29파운드(약 41,000원). 살 떨리는 런던 물가를 고려하면 굉장히 기특한 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에도 늘 그렇듯 방 탈출 게임같이 호스트의 이메일을 힌트 삼아 열쇠를 찾아냈다. 그리고 셀프로 현관을 따고 들어갔다. 에어비앤비에 묵으면 이렇게 셀프 체크인을 하는 경우가 많다. 집집마다 열쇠 숨기는 곳과 들어가는 방법이 가지각색이기 때문에 호스트의 메일을 주의 깊게 챙겨 봐야 하는데, 어떤 때는 메일을 잘 챙겨 보고 가도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는 곳도 있다. 그럴 때는 호스트에게 연락을 하거나, 촉으로 때려 맞추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주 흥미가 진진하다.
우리는 숙소에 짐을 풀고 슬그머니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런던의 저녁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동하느라 피곤했지만 꼭 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었다. 런던의 중심가인 '킹스크로스 역 King's cross station'에 내려 거리로 나서니 주변은 온통 영드에서나 보던 풍경들로 가득했다. 구름이 낮게 드리운 우중충한 거리를 배경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빨간 이층 버스. 순간 내가 영국에 있다는 사실이 빠르게 온몸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드라마틱한 장면 속에서 나는 더욱더 드라마틱하게도 '가족'을 만났다.
나는 이곳 영국 런던에서 나의 가족,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친척 언니, 아 더 자세히 풀어쓰자면 얼굴이 똑같이 생긴 일란성쌍둥이인 친척 언니들을 만났다. 두 사람은 얼굴만 닮은 것이 아니다. 둘은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직업도 같고, 지금은 나란히 런던의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불혹을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동안인 것까지 감안하면 엄청난 유전자가 이 두 사람에게 몰빵 된 게 아닐까 싶다.
언니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는 정말 공부에 최적화된 여자 기숙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책상 위는 온통 책과 자료들로 넘쳐났고, 벽은 각종 메모들로 빼곡했다. 노력과 고생의 흔적이 역력한 공간이었다. 언니들은 여기저기 떠돌다 온 우리에게 맛있는 한식을 차려주었다. 두 사람이 서면 꽉 차는 작은 주방에 서서 찌개도 끓이고 샐러드도 만들고 삼겹살도 구웠다. 그리고 보물처럼 아껴둔 김치도 넉넉히 썰어 냈다. 우리는 정성껏 차려진 음식들을 먹으며 4년 만에 만난 언니들과 유쾌한 대화를 이어갔다. 그녀들의 영국 생활과 우리의 여행 생활을 나누며 웃고 공감하며 서로를 격려했다. 낯선 도시에서의 첫날이 가족들로 인해 익숙하고 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빨간색 이층 버스의 이층 맨 앞자리에 앉아 도시의 야경을 구경했다. 딱 나흘만 머물기로 했는데 벌써부터 아쉬울 것 같은 이 기분은 무엇일까. 많이 알아보고 오지 않았지만 그동안 봐온 영드 덕분에 충분히 몰입 완료된 영국 여행의 시작. 남편도 못 말릴 나의 영국 덕질이 이렇게 시작되려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