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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너프 Jul 28. 2024

무조건 살고 싶다.

네가 만든 변화

아들아, 오늘은 갑자기 쏟아지는 비 때문에 하루종일 집에만 있었네.

함께 쏟아지는 비를 보고, 그 비를 자세히 보겠다고 엄마의 망원경을 찾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어제 다녀온 키즈카페에서 볼풀장이 엄청나게 마음에 들었던 탓에 집에 숨겨놓았던 볼풀공들을 꺼내달라고 했고, 엄마는 아침부터 족히 가로 120cm나 되는 볼풀장을 수동 펌프로 한 시간 동안 불었다. 웃긴 힘이 들면서도 네가 좋아할 것을 생각하니 기대감에 가득 바람을 넣었다지. 너는 확실히 마법 같은 존재이다.


그 덕에 일 벌이기 좋아하는 엄마는 오늘도 주방 상부장을 다 헤집었고, 너는 한참을 볼풀장에서 놀았다.

너무 감사한 하루다.


엄마는 예전에 간호사로 일했다.  병원은 크기도 종류도 정말 다양한데, 그중 엄마는 유명한 병원의 병동 간호사로 일했다. 일반 회사의 부서가 다양한 것처럼 병원도 마찬가지다. 보통 본인의 선호에 맞춰주는 경우가 많아 1 지망부터 3 지망까지 자신이 가고 싶은 부서를 쓴다. 엄마는 '내과 병동, 중환자실, 정신과'를 썼던 같다. 그렇게 엄마는 소화기 내과, 그중에서도 췌장암, 담도암, 간암 환자분들이 주로 찾아오는 병동이었다.

간암은 그나마 발견 시기에 따라 수술을 하면 예후가 좋지만, 췌장암이나 담도암의 경우 발견 자체가 늦어 수술을 하는 게 쉽지 않기도 한다. 그래서 약물 치료를 하면서 더 이상의 악화를 막아보려고 애쓰지. 환자분들은 그 과정이 엄청나게 치열하다. 밥도 먹지 못하고 입원 기간 내내 토만 하거나, 말 못 할 고통에 마약성 진통제를 달고 살기도 한다. 그렇게 치료를 하다가 집 근처 병원으로 전원을 가기도 하고, 응급실을 통해서 재입원을 하기도 하신다. 가끔은 야속하게도 그분들의 결말이 보이면 외면하고 싶었다.


기억에 남는 환자분이 계신다. 나이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조금 큰 아들이 둘 있으셨다. 보호자는 남편 분이셨는데 자주 환자의 상태를 묻고, 봐주기를 바라셨다. 누군가는 그것을 '유별남'이라고 표현했고, 엄마 역시도 처음에는 그랬을지 모른다. 환자분과 보호자분은 나를 마음에 들어 하셨다. 그렇게 엄마는 그 환자분께 '예쁜이'가 되었다. 매번 올 때마다 엄마를 찾아 주셨다.


여유가 생길 때면 보호자분의 고민, 걱정을 직접 듣기도 하면서 그렇게 그들의 유별남은 지극한 사랑임을 깨달았다. 사랑하는 가족 중 누군가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그 누구라도 살리고 싶을 것이다. 남아있는 아이들이 밟힌다고 하셨다. 조금이라도 엄마와 시간을 많이 보내기를 바라셨다. 나는 마음으로 그들과 가족이 되었다. 환자분이 제발 오래 살기를 바랐다.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다르게 환자분은 올 때마다 안 좋아지셨고, 결국 간성혼수까지 오게 되었다. 간성혼수는 간 기능이 나빠지면서 생기는 증상으로 정신을 잃기도 하고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하며 사경을 헤매는 것처럼 보인다. 관장이나 약물을 이용해서 혼수상태를 깨우기도 하지만 너무 심한 분들은 깨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그렇게 환자분은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게 되었다. 나는 진짜 가족도 아니었지만 마음이 쓰라리게 아팠다. 진짜 가족들은 오죽했을까? 결국 아이들도 알아보지 못하고 며칠 뒤 환자 명단에서 그분은 조용히 사라졌다. 장례식장에 가볼까 싶다가도 주제넘게 가는 것은 아닌가 싶어 혼자 조용히 기도했다.


병원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환자분의 사후세계는 알 수 없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처참하고 괴롭다. 조금이라도 죽은 사람의 귀에 남도록 외치고 외친다. 사랑한다고, 미안하다고. 그들의 통곡은 축축하고 무겁다. 사람의 시간은 누구나 유한하고, 죽음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무기력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때부터 지금 현재를 후회 없이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현재에 충실했다. 언제 죽어도 후회하지 않도록 말이다.


하지만 엄마는 너를 낳고 나니 언제 죽어도 후회를 할 것 같다. 당장 오늘 내가 뱉은 말과 행동들 중에서도 후회되는 것들이 열 손가락은 꼽을 수 있을 텐데, 죽을 때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떠오를까.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엄마는 너에게 하루에 수십 번 사랑한다고 말한다. 너의 응답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엄마는 알고 있다. 네가 독립을 원할 때, 언제든 떠나도 좋다. 그전에는 후회 없이 너에게 사랑을 주는 건강한 엄마가 되고 싶다.


추신. 참고로 너는 45개월에 엄마와 떨어져서 산다는 것에 울먹이면서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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