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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rng Jun 07. 2023

[단상] 기적은 없다,

추억만 남길뿐,

# 필리핀

수백 수천 대의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한대 엉켜 도로에 잔뜩 내려앉은 채 어기적 나아갔다.

그들과 함께한 등하굣길의 추억은 빼곡히 들어선 다양한 탈 것들로 그득했다.


3개월 만에 다시 찾은 세부에서 장시간 도로를 경험해 보니 옛 기억들이 조금씩 떠올랐다. 중학생 시절 그 많은 공장 근로자들은 오토바이로 출퇴근했다. 이제 그 동네를 떠난 지 이십여 년이 지나 여전히 그렇게 다니는진 모르겠지만 아마도 예전 수준은 아니겠지 감히 미루어 짐작된다. 달라진 소득 수준, 편안해진 대중교통, 안전 의식의 향상 등을 고려할 때 당연하다.


이곳에서의 차들은 오토바이를 경멸하는 것만 같았다.

앞장서서 나아가는 오토바이를 어떻게든 앞지르려 했다. 비켜나지 않으면 클락션을 울리며 위험을 알렸다. 오토바이를 앞지를 때는 그 흔한 깜빡이조차 켜지 않았다. 그냥 쓰윽.


오토바이는 차들을 한없이 무심히 대했다.

뒤에서 따라 오든 말든, 클락숀을 울리든 말든, 그저 제 갈 길을 갔다.

맞은편에서 차가 맞서 올 때는 그에 맞서 힘껏 눈이 멀라 조명을 치켜세우는 것만 같았다.


언제쯤 질서정연해 질까,

물론 그들만의 질서가 오롯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방인의 갈색눈에는 너무도 위태로워 보였다.

내가 차를 탄 총 여섯 시간 동안 사고를 못 본 게 기적 같았다.



개발도상국의 발전에 대한 경제사적 고찰을 해볼까 하다 고이 접는다.

정답은 없고, 오답과 차악만 가득한 세상에서 필부가 찾아본들 어쩌리,



사정도 잘 모르면서, 시답잖은 연민? 뭐 그런 거에 젖은 거일 수도 있겠지만

부디 안전해지길 바란다.

한강의 기적 따위는 없더라도 그들도 조금 더 안전한 나라에서 살길 바란다.

착한 그들의 미소가 더 안락해지길 바라마지 않는다.




# 공항라운지,

사회초년생 시절 pp카드를 만들고 공항라운지에 들어설 때면 성공한 직장인이 된 것만 같았다.

당당하게 카드를 내밀고 각종 다과를 무료로 음미할 때면 상당히 대접받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대학생 시절에는 pp카드의 존재조차 몰라서 더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라운지를 두 번 들려보고 느낀 점은 조금 가격이 있는 식당으로써 편안한 여행의 시작과 끝으로 포지셔닝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그대로인데 세상은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것은 그대로인데 나의 시선만 달라져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적응과 순응, 그리고 대응.

여전한 무지함을 뒤로하고 시나브로 나아갈 때다.



# 거북이

거북이를 평소에 볼 일은 잘 없지만 그렇다고 희귀하진 않다,

여의도공원에만 가도 연못에 살고 있는 거북이가 있고, 아쿠아리움 같은 곳에는 꼭 있기 마련인 멀지만 가까운 그런 동물이다

그런데, 왜 바닷속에서는 그렇게 만나고 싶은 걸까, 평소에 볼 일 없는 생경하고 오색 찬란한 물고기들에는 감흥이 그저 그렇다가도 거북이만 만나면 귀인을 만난 듯 흥분을 금치 않을 수 없고, 그날 다이빙은 성공적이란 생각이 자연스레 든다.


거북이가 물속에서 대단한 재롱을 떠는 것도 아니다. 그냥 무심히 제 갈 길로 지나갈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을 아로새기듯 만났단 사실을 격하게 추억으로 남기고자 한다.


이런 거북이의 삶은 어떨까, 그저 태어난 김에 살고, 살아있는 김에 여기저기 유영하는 그런 삶.

보이는 것만큼 마냥 편하지 않겠지만, 보이는 것만큼 마냥 편한 그런 삶이 그리우다.


그리운 자태를 다시 추억하며, 다음 바다를 다시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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