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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hyeon May 29. 2017

채식, 그 평화로운 해방

<채식주의자>와 <육식의 종말>을 읽고

     

포털사이트 기사 제목들을 훑어보던 내 시야에 들어온 게 있었다. 도살을 앞둔 돼지들에게 마취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도축 직전 각성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수많은 돼지들이 뜬눈으로 자신의 죽음을 목도한다. 감히 상상도 못할 공포다. 도축에서만 그러한가? 그들은 0.43평 남짓한 울타리 안에 평생을 서서 보낸다. 인간에게 더 부드럽고 연한 고기가 되기 위해서, 이빨을 뽑히고 꼬리는 잘린다. 대부분이 이런 삶을 견디기 힘들어 정신 이상을 겪는다. 그러다 구제역이라도 닥치면 그들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햇빛을 본 뒤 땅속에 산 채로 묻힌다. 기사를 접한 후 어느날 식탁 위에 차려진 수육을 보는데 역기가 올라왔다. 그 순간 내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채식주의자>의 영혜가 떠올랐다. 

     

이 글은 육식으로 시작해 약자(특히 여성)해방으로 끝을 맺는다.  

   

인간의 육식은 산업화 된 이래 다음 세 가지에 대해 폭력을 행사해왔다. 첫 번째, 누구나 알고 있듯, 동물이다. 비인간적인 도축 과정과 대량학살이 만연하다. 1800년대 고기 해체 공정이 기계화되면서 가축들은 체인에 매달려 머리 절단을 기다려야 했다. 그 옛날에도 절단기 4대 당 하루에 1,200여마리의 소를 도살했다. 목초지 개간은 동식물의 서식지를 파괴하며, 갈곳 잃은 이들의 멸종은 먹이 피라미드를 혼란시킨다. 두 번째, 자연이다. 인간이 먹을 수십억 마리의 소들이 토양을 재순환시킬 토착식물을 먹거나 밟아 없애 토지 부식이 일어난다. 목축업에서 해마다 배출되는 10억 톤의 유기 노폐물은 강과 바다로 유출돼 수질오염을 일으킨다. 사료용 작물 생산에 쓰는 화학 비료에서 발생하는 대량의 이산화탄소는 오존층 파괴와 지구 온난화 현상을 초래한다. 목초지 개간으로 인한 열대우림 파괴는 세계적인 사막화 현상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세 번째는, 인간이다. 지구 한편에서 비정상적으로 살 찐 소들과 그들을 먹은 이들이 비만으로 고통받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기아와 기근 문제로 고통받는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4명 중 1명이, 남미에서는 8명 중 1명이, 아시아 및 태평양 연안에서는 28%의 인구가 굶주림에 시달린다. 전세계적으로 해마다 4,000만에서 6,000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기아와 관련된 질병으로 목숨을 잃음에도, 브라질·멕시코·중앙아메리카 곡물 생산량의 3분의 1을 가축을 살찌우기 위해 쓴다.  
*참고: 제레미 리프킨, 「육식의 종말」, 시공사, 2014

   

이처럼 육식의 폭력성은 인간-동물, 인간-자연, 부유층-빈곤층으로 지배-피지배,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이분법적 계급 구조를 형성해왔다. 제레미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에서는 여기서 더 나아가 육식이 고착화한 남성-여성 계급 구조까지 시사한다. 다음은 육식의 종말에 언급된, 육식이 남성 지배적 문화 형성에 기여했음을 설명하는 사례들이다.
- 스페인에서는 남성의 용맹함을 보여주기 위한 투우 경기가 끝나고 나면 여성들이 남편의 저녁식사를 위해 황소 스테이크를 구매한다.
- 1863년 시행한 '영국 식사 습관에 대한 전국 조사'는 농촌 공동체에서 여성과 아이들은 주로 감자를 먹는 반면, 남성은 거의 매일 고기를 먹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빈곤층일수록 귀한 음식인 고기는 항상 남성이 우선이고, 다른 구성원은 그를 구경했다.
- 프랑스 인류학자 브르디외는 프랑스에서 강한 남성은 강한 음식(피가 흐르는 육류)이 어울리고, 샐러드는 여성에게 어울린다는 통념이 만연하다고 설명한 바 있다.
강자가 육식을 섭취하는 과정에 약자의 고정적인 역할관념과 희생이 따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다소 고전적인 사례들이지만 오늘날에 적용해도 무색하지 않다. 당장 우리집만 해도 아버지와 남동생의 반찬은 오징어와 고기, 어머니와 나의 반찬은 가지와 깻잎이다. 고기를 양보하는 것, 식탁을 차리는 것은 언제나 어머니(여성)의 몫이다.

   

이를 바탕으로 채식주의자에서 영혜가 육식단절로 저항한 이유를 짐작해본다. 육식은 약자가 받는 온 폭력과 억압의 표상이다. 영혜는 평생 억압을 받아왔다.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18살까지 체벌을 받았다는 말로 억압적인 유년시절을 보냈음을 암시한다. 그녀 아버지가 지닌 폭력성은 가족 식사자리에서 그녀에게 억지로 육류를 먹이려는 모습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매 끼니마다 밥을 차려주는 것을 두고 아내역할을 착실히 수행하고 있다 여긴다. 성역할을 고정시키는 차별적 관념이다. 그녀가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은 것을 자신을 유혹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부분은 특히 더 역겹다. 여성을 미적, 성적 대상으로 치부해버리는 폭력적 시선이다. 타인의 시선 역시 무례하다. 영혜는 남편 상사와의 식사 자리에 노브래지어 차림으로 간다. 그러자 상사의 부인은 그녀를 주저와 경멸어린 눈으로 흘끔거린다. 별 거 아닌, 폭력까진 아닌 것들이라 생각하는가? 아니다. 오랜 세월 지속된 억압 구조에 세뇌당했다. 너무 흔하게 당하는 바람에 폭력이라고 인지하지 못해왔다. 그래서인지 채식주의자는 글머리에서부터 영혜의 평범성을 강조한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지극히 평범하기 때문에 결혼했다고 말한다. 영혜가 받은 차별, 억압, 폭력은 지극히 평범한 그녀가 겪을 정도로 보편적이며, 역시 평범한 당신도 겪고 있을 일임을 말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영혜는 그보다 더 성숙한 방식을 택한다. 여기서 잠시 에코페미니즘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은 자연 해방을 추구하는 생태주의(Eco)와 여성 해방을 추구하는 페미니즘(Feminism)을 합친 말이다. 에코페미니즘은 오랜 세월 지배를 받아온 자연과 여성을 연관 짓고 사회의 이분법적 계급 구조에서 탈피하고자 한다. 인간의 자연파괴, 남성의 여성 억압,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유층의 빈곤층 착취와 같은 지배-피지배 구조를 지적하고 해결점을 찾는다. 이들은 자연과 여성에게서 ‘돌봄’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한다. 그동안 여성성과 그의 특징인 돌봄은 성장이 느리고 덜 발달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에코페미니즘은 지배가 아닌 돌봄과 배려가 더 성숙한 인간 단계임을 말한다. 이를 통해 사회적 차별과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본다.
*참고: 주은경, 「한강소설에 나타난 에코페미니즘 양상 연구 = A study on Aspects of Ecofeminism in Han Gang's Novels」, 조선대학교, 2012

   

오랜 세월 굳건했던 거대한 구조에서 그 모순과 부조리를 깨닫는 것만으로도 용기 있는 선언이다. 느리지만 결코 미미하진 않다. 아래는 채식주의자에 담긴 영혜의 말이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누구도 해치고 싶지 않아 하는 마음. 영혜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정신이 드러난다. 종래에 그녀는 여성 억압 도구인 브래지어와 옷을 벗어던지고 동물적인 본능,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동박새를 사냥한다. 여전히 폭력은 만연하다. 그러나 나는 분수대에 우뚝 선 그녀에게서 해방의 시작을 본다.  

   


*사진출처: MMCA 과천관 전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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