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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글루 Oct 20. 2016

괜찮아지는 것에 대하여

빌리어코스티의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무거운 맘이 채 가시지가 않아서

남겨진 시간 익숙해지지 않아서

무작정 나서본 거리 반갑지 않은 기억

아직은 허전함이 못다한 아쉬움이 많아

조금씩 너를 지워간다고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가끔씩 찾아드는 너의 생각에

이젠 무너지지 않는다고

괜찮을 거라고 너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흔하디 흔한 위로만큼

조금씩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우연한 어떤 날

너의 모습과 마주쳤을 때

지난 시간을 모두 돌려놓은 듯이

마지막 그날의 기억처럼

흔들리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아직 난 멀었고 이미 늦어버린 걸 알았네

- 빌리어코스티,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매년 이맘때쯤이면 빌리어코스티를 반복한다. 그의 목소리에 마음을 기대고 그의 감성에 이 계절을 맡긴다. 재작년 가을에는 <소란했던 시절에>가 그러했고, 올 가을엔 <보통의 겨울>이 그렇게 될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정규 2집 <보통의 겨울>의 트랙 6번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에 나는 10월의 쓸쓸함을 꾹꾹 눌러담는 중이다.


  사실 이 노래는 빌리어코스티가 정규 2집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노래는 아니다. 민트페이퍼가 인디 아티스트들의 좋은 곡이 열 곡씩 모일 때면 내는 비정기 프로젝트 앨범 'bright' 시리즈에서 처음 공개됐다. 세 번째 시리즈였으니 1월 즈음이었을 것이다. 그때 들었을 때는 별 감흥이 없었다. 한동안 임팩트 있는 연애를 안한 탓인지는 몰라도, 그가 항상 만들어내는 특유의 감성이 잘 담긴 노래구나, 정도로 넘어갔었다. 그러나 올 10월에 다시 들으니 웬 걸,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노래가 되어 있었다. 마치 제대하고 2년 만에 학교에 돌아와보니 맨날 나랑 같이 술 먹고 뻗어있던 친한 왈가닥 동기가 엄청나게 예뻐져 여신이 되어있던 기분이랄까.


    물론 이 노래는 방금 예시로 든 당황스럽지만 내심 좋고, 좋으면서도 어색한 그런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 쓸쓸하다 못해 씁쓸한 노래다. 특히 끝부분의 우연한 재회에 관한 가사는 개인적인 경험을 상기시키며 비릿한 웃음을 픽, 새나오게 한다. 한때 사랑했었던 그 누군가를, 혹은 앞으로 사랑할 누군가와 이토록 지독하게 이별하는 것을 떠올리면서 담담한 빌리어코스티의 목소리를 그 상상에 입히면 기어이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을 '괜찮지 않음'의 기억과 기분이 비집고 나오고야 만다.


    꼭 연인과의 이별이 아니라도, 우리는 모두 어떤 것을 상실한 뒤 괜찮지 않은 시간들을 보낸다. 괜찮지 않은 시간들을 충분히 보내고 나면 괜찮다고 생각되는 시간들이 온다. 아니, 와준다. 그러나 그게 정말 괜찮아진 것인지, 아니면 강도만 약해진 채 여전히 괜찮아지고 있는 것인지는 그때 당시엔 알 도리가 없다. 그런 순간에 우연한 재회라도 하게 되면, 모든 것이 참 선명해진다. 내가 정말 괜찮은지. 아니면 그냥 괜찮은 척을 하는건지.


  얼굴을 마주하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참 묘해서 괜찮던 것도 모두 괜찮지 않게 만들거나 괜찮지 않았던 것도 모두 괜찮은 것으로 만든다. 전자는 이별, 후자는 사랑의 시절에 그러하다. 조금씩 나아지던 앞부분의 그는 뒤에서 그 사람과 재회하며 자신이 여전히 '멀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실 이 노래는 꼭 마지막까지 듣지 않아도 제목에서부터 절대로 아직 괜찮지 않은 사람의 노래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나아져야할 일이 산더미같이 남아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연한 재회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지난 시간은 모두 되돌려진다.’ 그동안 조금씩 나아졌던 모든 감정과 마음 고생은 다시 원점으로 간다. 어쩌다 얼굴을 한번 본 것 뿐인데,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흔들림의 바다 속으로 침잠을 시작한다. 위험하다, 그 직감을 했을 땐 이미 '늦어버렸다.’ 흔들리고 또 흔들리며, 우리는 여전히 괜찮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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