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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글루 Oct 28. 2016

편서의 이유

  편서에 강박 같은 게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편서하면 안 된다는 강박이었죠.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 책을 골고루 읽지 않으면 안 된단다, 고 하셨던 게 꽤나 인상에 깊게 남았나봅니다. 이유는 기억이 안나는 거 보니, 경위 없는 정의였거나, 제 기억이 지웠거나입니다..


  수능이 끝나고 자유인이 되었을 때 아흐레를 굶은 맹수처럼 닥치는대로 문학을 읽기 시작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좋아하는 책만 보려해도 이렇게나 시간이 모자라고 인생은 짧고 재밌는 책은 끊임없이 쏟아져나올텐데 별로인 책까지 읽어야하나? 사는 동안 보고 싶은 책도 다 못 보고 죽을 게 분명하다.'


  그래서 편서하면 안된다는 강박과 자해를 때려치우고 그때부턴 읽고 싶었던 책과 읽고 싶은 책만 읽으며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기적 같게도 얼마 전부터 그렇게나 싫어하던 논픽션이 재미가 있어지더군요. 지식의 보고라는 점에서 말입니다. 잡다한 분야를 알아가는 재미를 이제서야 깨우친 것인지, 숙성시켜 지혜로 만들 원료들을 탐독하느라 시간가는 줄을 모릅니다. 이전에는 문학만을 고집했는데, 이제는 외려 문학 중에서도 과한 감성을 지닌 작품엔 부담을 느끼기까지 합니다. 예전엔 감성을 얻으려고 책을 봤는데, 요새는 지식을 얻으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문득 논픽션을 차근차근 읽다가 왜 어릴 적 그렇게 이런 류의 책을 싫어했는지 깨닫게 됐습니다. 논픽션 중에서도 여전히 문화학, 사회학, 언어학 같은 인문학 콘텐츠가 편한 저로서는 과학 서적류는 진심으로 젬병인데 그건 (인간을 이과와 문과 두 종류로 나누는 것은 싫어하지만 굳이 나누자면) 이과의 언어와 문과의 언어가 전혀 달라서입니다.


  어느 글이든 '놀라운,' '굉장한' 이런 단어는 참 자주 나옵니다만, 그 단어를 씀으로써 글쓴이가 전하고자 했던 감정(혹은 사건)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는 저 단어를 자신의 글에 심사숙고해서 써본 사람만이 알 수 있죠. 그리고 사람마다 천차만별입니다. 저 놀라움이란 단어가 갖고 있는 놀라움의 크기란 게.


  저 간명한 단어는 과학 서적에서 유독 많이 보이는데, 그 분야의 저자들은 크고 거대하며 일반인에겐 참으로 별 것인 상황을 '놀라운,' '굉장한' 정도로 압축시켜 표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때 문학을 즐겨 읽던 사람에겐 적응하기 힘든 갭이 생겨버리죠. 소설가는 빛에 반사돼 투명하게 반짝이는 먼지나 책상 위에 우두커니 놓인 필통더러 놀랍다고 하는 반면, 과학자는 우주의 폭발로 몇 천만 생명체가 태어나게 된 사건이나 인간의 DNA 수 십 만개가 조화를 이루는 상황 같은 것을 간단하게 놀랍다고 표현하고 넘어가버립니다. 그래서 읽는 사람이 마음 먹고 몰입해서 상상하려면 과학 서적 쪽이 몇 배나 더 힘듭니다. 상상을 해야하는 스케일이 다르니까요.


  그게 제가 편서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꿋꿋이 편서했던 이유인가 봅니다. 그 갭이 너무나도 커서요. 적응하기가 두려웠나봅니다. 적응도 잘 안 되고 자꾸 벽에 부딪히니 뒤로 물러났던 거겠죠. 이제야 서서히 좀 나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서로 쓰는 말이 이렇게나 다릅니다. 상대방을 잘 이해하며 살아가야 겨우 버텨볼만한 세상입니다. 여러 '상대방'을 미리 만나 예행연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책이란 여전히 참 좋은 선물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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