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주로 진행되는 전무님과의 미팅 안건중 하나로 우리 팀이 추진 중인 4개월짜리 프로젝트의 중간보고를 하기로 했다. 그동안 열심히 해왔던 업무에 대해 정리하고 피드백을 받기로 한 것이다. 이 보고의 결과에 따라 앞으로의 방향성이 달라질 수도 있으므로 평소보다 더 신경 써서 준비를 했다. 데이터를 정리하고, 논리를 다듬고, 예상 질문과 답변을 생각하고, 상무님과도 몇 차례나 리뷰를 하면서 보고서를 보완했다. 혹시나 설명이 부족한 부분이 있을까 싶어 첨부 페이지에도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였다.
미팅이 시작되었고, 내가 준비한 보고는 그날의 마지막 안건으로 상정되었다. 내 안건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을 것이므로 다른 안건들부터 얼른 진행하고 마지막에 길게 이야기하자는 상무님의 판단이었다. 그런데 가볍게 끝날 줄 알았던 안건들이 점점 길어지고, 늘어지고, 계속되다가, 마침내는 시간이 부족해지고 말았다. 결국 내가 준비한 보고는 화면에 띄워보지도 못한 채 전무님과의 미팅시간이 끝나고 말았다.
미팅을 마무리하면서 전무님은 "그 안건은 따로 일정 잡아서 다시 이야기하자."며 회의실을 나갔다. 보고를 받을 사람이 이렇게 결정해 버린 데다가, 그 바쁘신 분의 시간을 마냥 차지할 수도 없는 일이라 상무님도 별 수 없어 보였다. "네, 다시 일정을 잡아 보고 드리겠습니다."라고 말을 하긴 했지만 가슴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아쉬움과 씁쓸함, 그리고 허탈함은 어쩔 수 없었다.
아쉬운 이유는?
당연히 많은 노력을 들여 준비한 보고를 시작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씁쓸함은?
글쎄. 내겐 너무나 중요하고 내가 이렇게나 열심히 하고 있는 업무가 조직의 관점에서, 상위 리더나 차상위 리더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우선순위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아서였다.
허탈함은?
오늘 밀렸다고 보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날을 잡아서 언젠가 다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능날만 바라보고 열심히 공부해 왔는데 수능이 연기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맥이 툭, 끊긴 기분이다.
머리가 말한다. 조직의 우선순위에 따라야지. 내 안건이 더 중요했다면 상무님이 내 안건을 먼저 이야기하자고 했겠지. 우선순위가 뒤였다고 해서 내 일이 중요치 않다는 게 아니고 단순히 타이밍이 맞지 않았던 것뿐이니까 너무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말자. 보고를 아예 받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고 따로 시간을 잡아서 보자고 하는 거면 더 자세히 보겠다는 것일 테니 좋게 생각하자.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동안에도 많이 겪어왔고, 앞으로도 겪게 될 일이잖아.
머리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마음이 답한다.
"... 뭐래."
회사에서 일을 한다는 건 개인의 노력과 조직의 우선순위가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의 노력이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할 수도 있고, 생각했던 결과가 나왔더라도 회사 전체로 보면 별 임팩트가 없는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노력이, 내가 했던 고민이, 그 과정에서 얻게 된 경험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니까. 괜히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일이 아니다.
오늘은 보고를 할 기회를 잡지 못했지만, 조금 늦더라도 결국 나는 이 보고를 하게 될 것이다. 오늘 하려고 준비했던 것들은 그때 가서 풀어놓고 오면 된다. 오늘 느낀 아쉬움과 씁쓸함과 허탈함은 훌훌 털어버리고, 보고 일정이나 다시 잡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