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쓰다.
오늘은 비가 무척이나 많이 왔다. 평소의 나였다면, 밥을 먹기 위해 이 정도로 내리는 비를 뚫고 어딘가로 가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회사 건물 지하에 있는 식당 중에 하나를 골라서 간단히 먹고 자리로 돌아왔겠지. 그런데 오늘은 맛있는 음식에 진심인 팀원들이 콩국수를 먹으러 가자고 해서 얼떨결에 따라가게 되었다. 비도 많이 오고, 그래서 조금 춥기까지 한데 무슨 콩국수-라고 잠깐 생각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맛집으로 가도 사람들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말도 설득력이 있었다.
내가 콩국수를 먹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사십여 년을 살아오면서 콩국수 한 그릇을 온전히 혼자 다 먹게 된 것이 불과 5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그 맛을 알기보다 모르고 살아온 기간이 훨씬 긴 셈이다.
딱히 접점이 없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여름철이 되면 엄마는 바로 근처에 사시던 외할머니와 함께 종종 콩국수를 먹으러 갔다. 당연히 나도 같이 따라갔는데, 할머니와 엄마는 맛있다고 드시던 그 음식이 어린 내 입에는 좀처럼 맞지 않았다. 심지어 한창 왕성하게 막고 무럭무럭 자라고 있던 어린이일 때도, 청소년일 때도 그랬다.
내가 편식이 심했던 것은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내켜하지 않는 음식은 오이, 오이 정도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린 나는 오이를 참 싫어했다. 엄마가 싸 주는 김밥에 들어있던 오이는 쏙쏙 빼내고 먹었고, 여름철 별미라고 해주셨던 오이냉국에는 숟가락도 대지 않았다. 온 가족이 오이를 잘 먹는 것을 보면 딱히 유전적이라거나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이상하게도 오이에는 손도, 마음도 가지 않았다. 오죽하면 가족들과 등산을 가서도, 모두가 오이를 먹으며 수분을 보충할 때 나는 꿋꿋하게 물을 마셨더랬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역치가 높아진 건지 아니면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제는 오이에 대한 허용도가 꽤나 높아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비빔밥에 들어간 오이는 빼지 않고 먹게 되고, 그다음에는 김밥에 오이가 들어갔어도 빼지 않고 먹게 되고, 짜장면이나 콩국수 같은데 오이가 올라가 있어도 굳이 빼내지 않고 먹는 정도까지는 올라왔으니까. 물론 지금도 통으로 오이만 있는 경우에는 딱히 손을 대지는 않는다.
이야기가 잠깐 샜는데, 그것도 하필이면 오이로 샜는데, 하려던 이야기는 내가 오이를 싫어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콩국수를 즐기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어린 시절 엄마와 할머니가 가시던 가게에서 나오는 콩국수에는 오이 고명이 올려져 있었는데, 그 오이를 덜어서 엄마에게 주고 순수한 콩국수만 먹었는데도 입에 맞지 않아 대부분을 남겼으니 그냥 콩국수라는 음식 자체와 궁합이 맞지 않았던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내 머릿속에 콩국수는 ‘나와 맞지 않는 음식‘으로 각인되었고, 자연스럽게도 ‘딱히 내 돈 주고는 먹지 않을 음식’이자 ‘내가 먼저 제안할 일은 없는 음식‘이 되었다.
이렇게 서먹했던 콩국수와의 관계가 조금 좁혀졌던 것은 대학생 때였다. 우연히 친구들과 콩국수를 먹을 일이 있었는데, 그때 친구들이 “콩국수에 어울리는 것은 설탕인가 소금인가”를 놓고 논쟁하는 모습을 보며 놀라워했던 기억이 난다. 원체 서먹했던 음식이라 예전에 어떻게 먹었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친구들에게, 가장 입맛이 중립적일 내가 판결해 주겠노라 말하고, 두 개의 앞접시에 콩국수를 덜어 한쪽에는 설탕, 다른 한쪽에는 소금을 넣어 맛을 보았다. 결론은, 두 조합 모두 내게는 맞지 않았다. 넣어 먹으나 그냥 먹으나 콩국수는 여전히, 그리고 아직도 나와는 맞지 않는 음식이었다.
그다음으로 콩국수와 친해졌던 것은 아내와 결혼한 뒤의 일이다. 볼일이 있어 여의도에 들렀다가 맛집으로 유명한 A가게에 방문하게 되었다. 원래 콩국수를 좋아하던 아내는 당연히 콩국수를 시키고, 나는 비빔국수를 시켰다. 음식이 나오고서야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새하얀 국물의 콩국수를 먹는데 내 접시만 홀로 빨갰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 가게 콩국수 맛이 그렇게 좋은가?’싶어 아내의 콩국수를 한 젓가락 얻어먹었다. 음, 시원하고, 고소하네. 이런 맛에 먹는 건가 보구나- 생각하며 김치를 먹었는데 이게 웬걸. 생각보다 김치와의 조합이 너무 좋았다. 아내는 배가 부르다며 콩국수를 조금 남겼는데, 그것을 한 젓가락 더 먹어보니 아까보다 더 맛이 좋았다. 이번에는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먹어 보니 그 꾸덕지고 고소한 맛이 또 일품이었다.
이 날을 계기로 나는 콩국수와 한층 더 가까워졌다. 이제는 더운 여름이면 내가 먼저 아내에게 “콩국수 먹으러 갈까?” 하고 제안하는 수준까지 되었다. 콩국수 맛집으로 유명한 곳에 가서는 (콩국수 맛집에서도 비빔국수를 시키던 예전과는 다르게) 당연히 콩국수를 시키고, 집 근처에 있는 국숫집에 가서도 메뉴에 콩국수가 있으면 시켜보기도 한다. 콩물을 사다가 집에서 끓인 소면으로 콩국수를 만들어 먹기도 하게 되었다. 콩국수라는 음식의 맛을 조금씩 알고 즐기게 된 셈이다.
거센 비를 뚫고 도착한 오늘의 식당은 서울시청 인근의 B였다. 워낙 맛집으로 유명한 곳이라 예전에 아내와도 한번 와 본 적이 있던 곳이었다. 국수 한 그릇 치고는 가격이 비싼 편이지만, 심지어 비도 많이 내리는 날이었지만, 그래도 이곳이라면 팀원들의 선택을 납득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의 콩국수를 좋아하는 이유는 콩국물과 면 외에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오이 고명은 물론이거니와 저 두 가지 외에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는다. 심지어 나는 설탕파도 소금파도 아닌, 아무것도 넣지 않은 그대로 먹는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더 좋다. 꾸덕지고 새하얀 국물에 담겨있는 콩국수를 보고 있자면 참으로 정갈한 식사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콩국수를 먹을 때 반찬은 김치면 충분하다. 아니, 충분하다기보다 김치와의 궁합이 무척 중요하다. 콩국수의 꾸덕짐과 고소함, 차가움이 김치의 매콤함과 달큰함, 청량함, 그리고 아삭거리는 식감과 얼마나 잘 어우러지는지가 내게는 가장 중요하다. 면을 다 먹고 국물만 남았을 때, 그 국물을 숟가락으로 퍼 먹다가 김치 한 조각으로 잡아줄 수 있는지도 중요하다. 이것들을 충족시킬 수 있다면, 비가 미친 듯 퍼붓는 오늘 같은 날에도 즐거운 마음으로 콩국수를 먹으러 갈 수 있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먹느라 함께 간 팀원들과는 별로 대화를 하지 못했다. 별로 먹지도 않던 음식 가지고 이런 생각들을 하고, 그 생각들을 이렇게 글로 적기까지 하는 스스로를 보니 우습기도 하다. 누가 보면 엄청 까다로운 미식가인줄 알겠다 싶기도 하다.
평소의 나는 식도락과는 거리가 먼, 그래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도 ‘맛있다.‘라는 말 밖에 다른 표현은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맛 표현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여전히 모르겠지만, 그래도 맛있게 먹은 음식에 대한 이야기는 나눌 수 있으니까. 앞으로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온 날이면 이렇게 하나둘씩 적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