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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text Feb 04. 2024

나는 더 이상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농담 반 진담 반. 나는 "더 이상 무엇을 배우거나 익히고 싶지 않다. 지금까지 배워놓은 것으로 먹고살고 싶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간 읽어왔던 여러 책들이 하나같이 '발전하지 않는 것은 정체조차 아니고 퇴화나 다름없다.'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공부는 싫었다. 더 공부하고 싶지 않아서 대학원 진학은 생각도 하지 않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을 정도니까.


 하지만 막상 취직을 하고 보니 그간 배운 것 만으로 남은 날을 살아내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회사 업무에 필요한 지식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입사하고 몇 년이 지나자 이제는 아예 대학교 전공과는 거리가 있는 직무를 맡기도 했다. 결국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면 '새로운 거 배우기 싫어!'라고 하면서도 새로운 일을 맡았으니 그것을 배워야 했고, 새로운 툴이 나오면 그것도 익혀야 했다. 엑셀의 함수가 그랬고 파워포인트의 단축키가 그랬고 SQL을 익혀서 데이터를 처리해야 했고 화상회의나 그 외 업무 협업을 위한 다양한 툴에 익숙해져야 했다. 이제는 무려 AI라고 하는,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마저 마주하고 말았다. 여전히 새로운 것을 익히고 싶지는 않지만, 이제는 그것이 통하지 않는 투정임을 알게 된 슬픈 직장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지금은 PM이라는 역할을 맡아 다양한 분야의 일을 들여다보고 있지만, PM이 되기 전까지 나는 데이터를 다루는 일을 했었다. 대학교 전공부터 그쪽이었던 이들에 비하면야 경력이 짧지만 관련 자격증도 따고 회사 내부에서 부여하는 역량 등급도 인정받고 관련 업무를 진행하면서 유관부서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약 3년 정도 전의 일이다.


 얼마 전에 당시 카운터 파트였던, 데이터 업무를 계속하다가 지금은 팀장이 된 분을 만나 협업 아이템을 논의할 일이 있었다. 앞선 회의가 늦게까지 이어진 터라 제대로 준비를 하지 못하고 들어갔지만, 그래도 예전에 했던 가락을 생각하고 조금은 마음 편히 들어갔는데 이게 웬걸. 이미 어느 경지에 오른 사람처럼 그는 깊이 있고 어려운 이야기도 최대한 풀어서 설명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 이상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보통은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쉽기 마련인 조직의 비전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떤 기술을 키우는 것이 자기 조직의 목표라는데 그 기술이 뭔지를 알아야지. 아, 나는 이렇게 새로운 문제를 하나 더 발견하고 말았다. 새로운 것을 익혀야 할 뿐 아니라, 기존에 익혔던 것도 그대로 두지 말고 계속 갈고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와의 대화를 끝내고 자리에 앉았는데 문득 '그는 이 회사를 나가더라도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이럴 때 써도 되는 걸까. 나는 어떨까. PM을 맡으면서 부쩍 자주 하게 된 생각인데, 나는 아직 자신이 없다. 회사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은 그나 나나 마찬가진데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반감기라는 말이 있다. 방사선 물질의 양이 처음의 절반으로 줄어드는 데 걸리는 시간을 의미하는 말이다. 물질마다 고유의 반감기가 있어 화석의 연대 측정 같은 목적으로 쓰이는 개념인데, '트렌드 코리아'의 저자로 유명한 김난도 교수는 그의 한 강의에서 이 반감기의 개념을 빌려 '업무 역량의 반감기'라는 말을 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업무 역량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데 걸리는 시간. 4.5년이라던가.


 평균이야 4.5년일 수 있지만 직무마다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나의 반감기는 저것보다 훨씬 짧은 것 같다. 게다가 PM의 역할을 하기 위해 다방면의 고민을 하다 보니 반감기도 더 많은 영역에서 동시에 찾아오는 기분이다. 모델링도 조금, 마케팅도 조금, 서비스 기획도 조금, 여기저기 조금씩 접하던 것들이 잠깐만 방심에도 동시에 우르르 후퇴하는 기분. 요즘처럼 육각형 인재를 요구하는 세상에서는 넓게 안다고 깊이가 없으면 결국 살아남지 못한다는데, 더는 뭘 배우거나 익히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니.


나, 괜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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