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B coffee bar / Copenhagen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런 것 같다.
새로운 물건을 사면 주변의 부러움을 사고, 새 건물들이 들어서는 곳엔 어김없이 돈과 사람이 모인다. 왜 그럴까? 새 것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성취할 능력이 있고, 대개는 그 능력이 풍족한 부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새 것에 대한 열망은 개인의 판단을 넘어선, 인간의 본능인 것만 같다.
새 것이 좋다, 싫다를 생각해 볼 겨를도 없다. 우리를 둘러싼 대다수의 사람들이 깨끗하고 반듯하게 빛나는 것에 끊임없이 감탄한다. 새로 분양받은 아파트가, 깨끗하게 리모델링한 인테리어가, 새로 뽑은 차가 좋다 한다. 소중한 사람과의 기억이 담긴 사물이나 불변의 명품을 제외하고는 이 강력한 선호를 벗어나는 예외는 찾기 힘들어 보인다.
새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문제는 새 것이 기존의 것과 거슬리게 대비되는 순간 일어난다. 낡은 주택가 옆에 깔끔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 그 사이에 경계가 생긴다. 과거와 현재의 대비, 풍족과 부족의 대비, 가지런함과 제멋대로의 대비. 이 거슬림이 자본의 논리와 만나면, 오래된 것은 여지없이 사지로 내몰린다. 그렇게 우리를 둘러싼 공간들은 끊임없이 파헤쳐지고 새 것들로 채워져 왔다.
얼마나 더 바꾸면 만족할 수 있을까? 완전한 끝은 없어 보인다. 새 것은 계속 탄생하고, 지금의 새로움은 미래의 새로움에 의해 버려질 것이다. 한 사람의 무수한 시간과 선택이 담긴, 그의 또 다른 모습을 미처 알아보기도 전에. 그렇게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사람들이, 그리고 내가 잊혔을까.
그래서 나는 코펜하겐을 좋아한다.
이 도시는 시간의 부대낌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다른 유럽 도시들처럼 구시가지만 유물처럼 분류되어 있지도 않고, 날 선 신축 빌딩이 주변을 초라하게 만드는 풍경도 없다. 상점들은 화려하게 시선을 끌진 않지만 조용하게 말을 걸어오는 듯한 느낌이다. 발길을 멈춰 잠시 보고 있으면 누가 어떤 마음으로 만들고 시간을 보내왔을지 상상하게 된다.
코펜하겐에는 근사한 카페들이 많지만, 햇볕도 잘 들지 않는 인적 드문 뒷골목에 위치한 한 카페를 즐겨 찾았었다. 오래된 건물 반지하에 엉성하게 걸쳐둔 구식 문짝들. 입간판마저 없다면 장사를 하는지조차 알기 어렵다. 한국에서 이 정도면 외벽을 칠하든 내부를 환히 밝히든 무슨 수를 썼을 테지만, 이 카페는 바로 여기서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얼룩진 나무판자로 만든 입간판과 빛바랜 차양막이 오래된 골목 풍경에 순응한다. 그 위에 새겨진 카페 이름은 산세리프의 얇고 좁은 폰트로 단정하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입구 오른편엔 짙은 녹색의 철제 라운지체어가 놓여 있는데, 그 부드럽고 넉넉한 곡선이 각진 창틀의 삭막함을 조금 풀어주는 느낌이 든다. 바탕을 해치지 않으면서 은근 상반된 요소들이 시각적인 리듬을 만든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밝고 차가운 자연광에서 어둡고 따스한 조명으로 장면이 급격하게 전환된다. 반지하라고 애써 환하게 밝히진 않는다. 카운터를 비추는 작은 펜던트 조명들은 제 역할에 충실하다. 작고 영롱하게 빛나는 테이블 램프 하나만 추위에 지친 손님을 맞을 뿐.
이 분위기를 결정지은 가장 큰 요소가 무엇일까? 천장을 떠받치는 목재 장선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 건물을 지탱해 왔을지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거칠고 빛바랜 목재 장선이 그대로 노출되도록 한 순간, 그 아래 놓일 사물들의 느낌도 자연스레 결정되었을 것 같다.
카페 내부는 카운터를 가운데 두고 ㄷ자로 된 독특한 구조로 되어있다. 'ㄷ'자 각 획마다 세 개의 공간이 방처럼 구분되어 있다. 아마 오래된 건물의 지층이라 벽을 허무는 등의 구조 변경은 어려웠을 것이다. 커피 주문을 마치면 한 바퀴 빙 둘러 방마다 자리가 있는지 살피게 된다.
첫 번째 공간과 카운터 사이는 이렇게 절반쯤 벽으로 분리되어 있다. 저 벽을 따라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안쪽 공간이 나타난다. 손님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길목인 셈인데, 거기에 보란 듯이 라운지체어 한 쌍을 두었다. 붓터치가 대담한 커다란 그림, 포근한 양털 러그와 촛불은 전체 공간의 초점이 되어준다. 카페에 들어서는 순간에는 시선이 머무는 따뜻한 풍경이 되고, 자리에 앉으면 외부까지 트인 느낌을 준다. 카페에서 가장 불편하지만 단연 인기 있는 자리였다.
첫 번째 공간은 반듯한 테이블과 의자들이 나란히 배치된 곳으로, 학생들이 앉아 공부하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입구에서 본 짙은 녹색과 투박한 나무, 철제 소재의 조합이 이 방까지 자연스레 연결되어 있다. 같은 느낌이 반복되면 깔맞춤처럼 조금 지루해 보일 수 있는데, 푸른색 펜던트 조명으로 산뜻함을 더해 주었다.
이어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두 번째 공간.
건물이 반듯한 사각형이 아닌지, 이렇게 맘대로 생겨먹은 모서리가 있다. 여기에 기다란 빈티지 벤치와 라운지체어를 벽면을 따라 두었다. 네모 반듯한 테이블을 두는 것보단 아늑해 보이지만 반대편 테이블을 관전하는 배치가 된다. 여기에 테이블 램프의 강한 빛을 시선보다 낮게 드리우면, 은은히 밝게 빛나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대화에 집중하도록 해준다.
어둡고 울적한 반지하 창문을 상쾌하게 바꾼 저 오렌지색 플라워팟 펜던트. 내 취향은 아니지만 저 위치엔 동글동글 톡톡 튀는 저 디자인이 참 어울린다. 언젠간 나도 취향의 안전지대를 벗어나 과감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반대편에는 짙은 녹색-철재-투박한 나무 소재로 카페의 아이덴티티가 계속 이어진다. 여기에 아치형으로 쑥 파인 벽면에 눈길이 간다. 다른 공간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급히 뚫은 듯, 형태도 마감도 제멋대로다. 카페는 이런 결점을 없애지 않고 그저 쿠션을 여럿 두어 한 사람이 폭 기대앉을 수 있게 해 두었다. 낡은 것을 존중하고 지금에 맞는 의미를 찾아주면, 돈을 써도 흉내내기 어려운 개성이 된다.
가장 안쪽 구석진 세 번째 공간은 나머지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조명과 테이블, 의자가 블랙 컬러의 동일한 형태로 맞추어져 있기도 하지만, 더 큰 차이는 모두 흠집 없이 윤이 나는 새 물건이라는 점이다. 매끈하게 도장된 표면 위로 빛이 선명하게 반사되면서 공간과 사물이 명확하게 분리된다. 마치 해 질 녘 어둑해지는 창 밖을 조용히 바라보는데 엄마가 불쑥 들어와 형광등을 팍 켰을 때의 느낌 같았다. 나는 블랙을 사랑하고 날렵하게 잘 빠진 CH88 의자도 아끼지만, 여기 머무르고 싶은 매력을 느끼진 못했다.
카페는 이 장소가 가진 인상을 자기들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제 멋대로 패인 표면, 뒤틀리고 바랜 목재의 질감, 쓰임을 알 수 없는 구조물은 낡은 건물만의 특이점이다. 여기에 전체적으로 빈티지 가구와 조명을 배치하거나, 투박한 철재나 파티클 보드같이 세월을 가늠하기 힘든 소재를 활용했다. 완전 새 것으로 보이는 물건은 카운터 옆에 놓인 작은 램프와 오렌지색 플라워팟 정도인데, 자칫 우중충해 보일 수 있는 공간에 활력을 주기 위한 의도된 선택이었다. 이들마저 수 십 년 전부터 양산되어온 디자인이라 고전적인 느낌을 풍긴다. 이런 방식으로 새 것과 낡은 것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편안하고 재치 있으며 세련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오래된 공간을 마주할 때면 늘 이런 생각이 든다.
그 옛날엔 어떤 쓸모를 위해 이렇게 만들어졌던 것일까?
원형 그대로 살아남은 것들은, 왜 버림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일까?
묵직하게 그러나 편안하게 감싸는 이 기운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그리고 아마 이 곳에서 같은 고민을 했었을 지난 사람들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면, 아무리 손때 묻고 쓸모없는 것이라 해도 쉽게 눈을 떼지 못한다. 재밌고, 궁금하고, 가끔은 이유 모를 아련함을 느끼기도 한다. 만난 적 없는 사람들과 보이지 않게 연결되는 것 같기도 하고, 커다란 시간의 흐름 속에 떠다니는 먼지처럼 호젓해지기도 한다. 이런 느낌, 나를 압도하는 분위기는 오직 시간만이 만들 수 있다.
시간의 지층은 자연뿐만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공간에도 쌓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기에 가치를 발견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헤아릴 수만 있다면 세상 하나뿐인 밑그림을 공짜로 얻을 수도 있다. 낡은 것을 새 것으로 밀어내기 전, 한 번쯤은 내 것으로 받아들일 뭔가가 남아있는지 생각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