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얇았던 원장의 소싯적 이야기
요즘 '한의원 2.0'을 운영하면서 새삼 '한의원 1.0' 때 기억이 떠오른다. 여기서 "2.0"은 현재 운영하는 한의원. "1.0"은 전에 하던 한의원이다. 굳이 "전 한의원", "현 한의원"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전', '현'이라는 말로는 변화의 느낌을 담아내기 힘들어서다.
'한의원 1.0'을 했을 때, 나는 사람 말을 무척이나 잘 들었다. 어떤 합리적인 기준이 있었던 건 아니다. 먼저 와서, 더 많이 이야기하는 사람 말을 귀담아들었다. '경청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뿌듯해했으나, 지금에서 보면 모함에 쉽게 넘어가는 무능한 관리자였다.
이런 일이 있었다. 실장-팀장-평사원의 조직체계에서 어느 날 '팀장'이 찾아와 실장에 대한 험담을 했다. 실장의 언행이 위압적이라 모든 직원들이 힘들어하고 심지어 나갈 생각까지 하고 있다는 것. 평소 실장이 말을 툭툭 내뱉는 성향을 알고 있던 터였다. 직원들이 나갈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에 당장이라도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한의원에 심각한 손해가 발생할까 봐 다급해졌다.
어느 날 실장을 불렀다. 충분한 상황 설명 없이 퇴사를 권유했다. 상대가 해명할 기회나 시간을 주지 않고 급하게 내린 결론이었다. 실장은 황당해했다. 내 맘이 굳은 걸 알고는 더 이상 아무 말하지 않았다. 인수인계 기간 동안 차가운 얼음공주처럼 지내다가 퇴사했다.
실장이 퇴사한 이후 그 팀장은 기가 살았다. 새로운 실장이 왔지만 본인의 손아귀에 넣어서 흔들었고, 심지어 치료실에서 다른 직원들에게 일을 맡기고 본인은 놀았다. 치료실 신입 직원이 들어왔다가 그런 행태에 화를 내고 퇴사한 게 연달아 2번이었다. 팀장을 불렀다. 당신은 일을 안 하면서 지시만 한다고 해서 신입 두 명이 연달아 나갔다. 어떻게 된 거냐? 변명으로 일관하다가 더 이상 안 되겠는지 팀장은 퇴사했다.
여기까지 이르러 모든 진상을 알게 되었다. 실장은 말이 센 게 흠이었으나, 나름 성실했고 남 뒷얘기는 안 하는 성향이었다. 팀장은 겉으로 일하는 척, 뒤로는 요령을 피웠으며 남을 뒤에서 이간질했다. 험담을 밥 먹듯 하는 사람 말이 워낙에 많이 들려서, 그쪽 의견이 맞는다고 판단한 내 잘못이었다. 본인을 견제할 실장이 사라지니 팀장이 더 기가 살아 요령을 맘껏 피웠던 것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
한창 한의원이 휘청거릴 때 구원 투수처럼 입사한 실장이 있었다. 혼자서 1인 3역을 했다. 데스크도 보고, 치료실 물리치료도 돕고 마감 때 청소까지 도맡아 했다. 그 실장과 함께 치료실 직원을 한 명 한 명 다시 뽑으며 시스템을 재건했다. 힘들 때 함께 했던 기억 탓이었을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실장 말을 믿고 들어줬다.
어느 정도 한의원이 본 궤도에 올랐을 무렵, 치료실 어린 직원 하나가 실장님께 소심한 반항을 했다. 당시 치료실에서 환자 발침(환자 몸에 꽂힌 침을 빼는 행위)을 하면, 환자 종이 차트에 발침한 직원 이름을 적는 게 원칙이었다. 발침 실수를 막고 책임감을 심어주기 위한 조치였다. 환자 수가 많아져서 바빠지니까 치료실 직원들이 힘들어했다. 실장이 그런 상황에서 강압적으로 다그치면서 일을 시켰다. 그래서 그 치료실 직원이 반발심이 들었나 보다. 발침을 하고 나서 환자 차트에 본인이 아닌 다른 직원 이름을 적었다.
실장이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질책을 했고, 그 직원도 대들었다. 실장은 기분이 너무 나빠서 그 직원과 같이 갈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실장의 화를 풀어주리라 다짐했다. 치료실 직원 A를 불렀다. A는 나에게 사죄했다. 자기가 그런 행동을 한 건 잘못이며, 실장님과 식사라도 하면서 풀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총애하는 실장의 말에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어떻게든 다시 잘해보겠다는 그 친구의 말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런 큰 잘못을 저지른 당신과는 같이 갈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 애쓰던 A는 나의 결정이 굳건함을 알았다. 그리고 원망의 말을 남긴 채 자리를 떠났다.
그 공백으로 한의원 분위기는 한동안 어수선했고, 매출 또한 곤두박질쳤다. 어찌어찌 안정을 되찾고 몇 달 후 실장이 휴가를 떠났다. 실장이 없는 그 기간 치료실 직원 3명이 모두 나에게 와서 면담을 신청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또 무슨 일이 온 것인가? 그리고 듣게 된 실장의 비행(?). 실장이 환자와 직원 험담을 밥 먹듯이 한다는 것. 치료실 B에게 C 험담을 하고, C에게는 D 험담을, D에게는 B 험담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환자들 험담도 만만치 않았다. 한의원에 종사하는 사람이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도 있었다. 당시 다이어트 프로그램을 함께 이용하는 부부가 있었다. "저 여자는 참 못생겼는데, 복은 많네. 남편이 저렇게 잘 생겼잖아. 어떻게 만났을까?" 그리고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한의원에 자주 오시던 80대 할머니도 있었다. "저렇게 나이 많이 먹었는데 죽지도 않고 한의원 다니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직원들은 자리를 피할 수도 없고 죽을 맛이었다고 한다. 실장은 자신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극구 항변했다. 모두의 동의를 얻어 삼자대면한 날. 직원들의 온건한 비평에도 '어디서 감히. 나, 실장이야. 실장' 이렇게 외치는 실장. 진지하게 경청하기보다는 자신의 직급을 이용해 누르려는 모습을 보고 그의 전모를 알아버렸다.
가장 힘들었을 때 도와주었던 모습을 잊지 못해 실장에게 정신적으로 크게 의존했던 내가 문제였다. 직원들은 그전에도 나에게 피드백을 주고 싶었으나, 원장님이 너무 실장 편만 드는 모습에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가장 큰 피해는 원장인 내가 보았다. 중간에 다른 직원이 이간질을 했지만 최종 결정은 내가 내렸다. 한의원을 나가게 된 직원은 결국 나를 원망하게 된다. 거기에다 직원 충원이 안 되거나 한의원의 분위기가 안 좋아서 추락하는 매출은 덤이다.
호되게 과외비를 지불하고 깨달았다. 한쪽 말만 듣고 판단을 내리면 안 된다. 믿을 만한 사람이 말을 해도 반드시 전체를 파악해야 하며, 그 사람 기준이 아닌 나만의 객관적인 기준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팩트풀니스'(Factfulness)의 저자 '한스 로슬링'이 했던 말을 인용한다. "다급함 본능이 발동하면 다른 본능도 깨어나 분석적 사고가 멈춰버린다. 일단 시간을 갖고 정보를 더 찾아보라. 지금 아니면 절대 안 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이것 또는 저것인 경우도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