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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태형 Oct 13. 2022

작아서 큰 세계

작아서 큰 세계 (11)

  요즘 내가 가장 많이 찾는 단어는 ‘연결감’이다. 

  ‘쓰는’ 대신 ‘찾는’이라고 한 이유는, 말 그대로 내가 이 단어를 찾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여러 상황에서 굳이 ‘연결감’이란 단어를 찾아 불러본다. 또 ‘연결감’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단어를 쉬이 무시하지 않고 아끼고 싶은 마음에서이기도 하다.

  어떤 책의 제목처럼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다. 내 세계의 한계를 가뿐히 뛰어넘고 싶어 이 단어를 마구 갖다 붙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다 가만히 생각해 본다. 그러면 어떤가. 요즘 이 말처럼 나에게 착 달라붙는 말은 없다. 이 말을 찾아 굳이 명명할 때면 난 삶에 착 달라붙어 있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수많은 연결 속에, 그 핵심에 ‘이야기’가 있다. 정혜윤 작가의 책 『슬픈 세상의 기쁜 말』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당신을 당신으로 만든 이야기를 들려 달라. 
나는 살아 있는 자의 귀로 듣겠다.


  난 이 책에 실린 이야기를 ‘살아 있는 자의 귀’로 들었다. 정혜윤 작가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멋지고 아름답고 위로를 주는 ‘이야기’를!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공중에 흩어졌을 수도 있는데, 한 작가의 귀로, 종이로, 편집자의 손으로, 서점으로, 택배로 연결되고, 연결되고, 연결되어……, 나에게까지 온 것이다.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말이다. 


  그래서 나도 이야기를 하나 해볼 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박카스와 검은 봉지’ 편) 도서관에는 날마다 공간을 반짝반짝 빛나게 해주는 어르신들이 계셨다. 청소를 마치고 나면 바닥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밭에서 집에서 직접 기르고 만든 음식들을 꺼내놓고 담소와 함께 즐기는 시간을 가지셨다. 그날도 나는 그 맛깔난 음식들을 감탄을 연발하며 먹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시작된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업둥이’라는 말이 나왔다. ‘업둥이는 굴러 들어온 복덩어리’라는 말이 먼 속담처럼 들리지 않아 나는 말을 보탰다.


  “저희 삼촌도 업둥이예요. 딸 넷 있는 집이어서 그런지 누가 저희 외할머니 댁 앞에 저희 막내 외삼촌을 아주 어릴 때 놓고 갔대요. 어려선 몰랐는데 저도 얼마 전에 알았어요. 그런데 참 희한한 게 그동안은 엄마랑 이모들, 외삼촌이 정말 쏙 빼닮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말을 듣고 보니까, 외삼촌만 피부색이 까맣고 머리카락도 많이 곱슬거리는 거예요. 뭐, 그래도 외삼촌은 외삼촌이지, 달라진 게 없더라고요. 마음은 똑같아요!”


  그런데 내 얘길 눈을 껌벅이면서 유심히 듣던 한 어르신이,

  “그… 혹시 우성이네 아녀?”

  라고 하셨다. 반갑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오! 어떻게 아세요?”

  “응, 내가 거 한 동네 살았거든. 그람 선상님은 몇째 딸의 딸인 거여?”

  “막내요. 저희 엄마가 막내세요. 아니, 딸 중의 막내고 다섯 중 넷째죠. 삼촌이 막내니까요. 와, 이런 우연이! 무지 반가워요, 어르신.”

  그렇게 단막극 같은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어르신의 입을 빌려 듣는 우리 외할머니 댁 이야기는 꼭 옛날이야기 같았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술문학의 부활을 맛보는 기분이랄까. 밤도 아닌데, 어린아이도 아닌데, 나는 연탄불에 지핀 아랫목에 두툼한 이불을 덮고 군고구마 먹으며 듣던 옛이야기처럼 귀를 쫑긋 세웠다.



조치원 청라리, 

전화기도 없고 살림집도 열두어 채밖에 안 되는 

아주 작은 마을에 황 씨네 딸 부잣집이 있었다. 

딸 넷을 내리 낳은 어머니는 죄인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누구 하나 아들을 못 낳는다고 타박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남자 형제가 없는 남편에게 아들 하나 못 낳아 준 게 괜히 미안해 

가슴에 뭐가 얹힌 것 마냥 답답하기만 했다.

그렇게 막내인 넷째 딸을 낳고 

이제는 더 이상 아이가 생기지 않아 포기한 채 세월은 흘렀다. 

큰딸은 벌써 시집가서 아들 딸 하나씩을 낳았다. 

둘째 딸도 얼마 있지 않으면 시집을 갈 것이고, 

셋째 딸도 둘째가 시집가면 한 동네에서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란 

동갑내기한테 시집을 보낼 생각이었다. 

막내도 어느새 훌쩍 커서 열 살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아침 차릴 채비를 하려고 어머니와 딸들이 문을 열고 나오자 

마당 입구에 포대기가 보였다. 

눈에 잘 띄라고 보란 듯이 떡하니 놓은 것만 같았다. 

모양새를 보니 아기임에 틀림없었다. 

비록 오래전 일이긴 하나, 아이를 넷이나 낳고 키운 집안이 아니던가. 

“저게 뭐여?!!” 

딸 중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 알면서도 다른 딸은 “글쎄.”라고 했다. 

이건 필시 굴러 들어온 복덩어리라는 걸 어머니와 딸들은 모두, 직감적으로 알았다. 

여기에서 방점은 모두 직감적으로 알았다는 데 있다. 

아니, 어머니와 딸들만 안 것이 아니라 방 안에 있던 아버지도 알았다.

우연인 듯 운명처럼 어린 사내아이가 황 씨네 집에 들어온 것이다. 

이 아이를 어쩔까, 황 씨네 사람들은 고민하지 않았다. 

무슨 사정이 있을 테지, 우리가 키우면 되지, 모두 그런 마음이었는데 

희한하게도 이런 생각은 아주 작은 이 마을 전체에 퍼졌다. 

누구 하나 이 애를 어찌 키우려고 그러느냐, 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굴이 까맣고 심하게 곱슬거리는 머리털을 가진 아이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황 씨네 귀염둥이 막내가 되었다. 

잔병치레도 심하고 말도 더듬는 황 씨네 막내는 병원을 들락거리고 

길도 곧잘 잃어버렸다. 하지만 걱정 없었다. 

사랑으로 보살피는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 중에는 어린 자식들도 있었고 소문을 낼 만한 일명 ‘떠버리’도 있었지만 

그 누구도 황 씨네 막내가 업둥이라는 걸 말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업둥이라는 것을 아예 잊은 듯했다. 

그렇게 황 씨네 막내는 몸이 약한 상태로 왔지만, 

그래서 더욱 새로운 가족과 마을의 손길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 결혼하여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다.



  아, 이건 그 자리에 있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공기였다. 흡. 난 그 공기를 빨아들이듯 숨을 들이마셨다. 작은 이야기. 하지만 너무 작고 뻔해서 ‘아, 그래서 아들 없는 집에 누가 애를 버리고 갔구나.’ 같은 얄팍한 포장지 같은 말로 끝나지 않을 이야기. 아들이 없어 속앓이 한 건 맞으나, 혹여나 아들이 없는 집이라 누군가 황 씨네 집을 고른 걸 수도 있으나, 이런저런 이유가 하등 중요해지지 않는 이야기.

  난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속살을 맛볼 수 있었다. 꼭 된장찌개처럼 맛있었다. 그리고 이건 우리 엄마와 외할머니 그리고 외삼촌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나는 전혀 모르고 이분은 알고 계신다. 기억을 더듬더듬 찾아서 천천히, 그리고 가지런히 배치한 이야기들은 너무도 작고 작아서, 그리고 너무 오래되고 멀어서, 이 연결감을 어찌 설명할 길이 없었다. 

  우리 집안 이야기를 특별히 아름답게 포장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건조하지도 않게 나른하게 이야기하는 어르신 입술의 구멍은 참 컸다. 그 입술 구멍 안에 길고 긴 장대함이, 내가 바라는 연결감이 있었다.

  외삼촌을 어루만지고 함께 놀던 그 손이 나를 어르고 달래고 키워냈다. 그리고 외삼촌과의 인연과 사연을, 어르신에게 들었던 초가을 도서관에서의 기억은 내게 어떤 ‘시간’을 선물해 주었다. 그 시간은 내가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는 세계다. 그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는 세계로 인해 내가 나이게 되는 것이리라. 그래서 ‘작지만’이 아니라 ‘작아서’ 커다란 세계에 찰싹 달라붙어 있고 싶게끔 만들어 주었다. 이런 작은 것들이 모이고 모여 때론, 삶을 지탱해 준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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