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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cy Lee Mar 22. 2020

지금 대의민주주의는 있는가

민주당과 통합당의 비례정당 경쟁 사태를 바라보며

    더불어민주당이 비례연합정당—더불어시민당이라고 칭하는—참여 내지 창당을 공식화하고, 이에 녹색당 등 소위 ‘소수’ 정당들이 각기 반응을 보인 이후로 ‘미래통합당’—언제 또 당명이 바뀔지 모르니 그 이름을 부르기가 참 애매한 바로 그—의 묘수라 불려도 좋을 비례정당 꼼수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미래한국당 창당의 의미가 단지 다수 의석을 확보하는 데에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더불어민주당을 구성하는 거대한 정치세력의 실상을 드러내는 것이었으며, 그 실상이 통합당 본인들의 인간적 남루함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


“이념, 성소수자 문제라든가 불필요한 소모적 논쟁을 일으킬 수 있는 정당과의 연합에는 어려움이 있다.”[1]

“녹색당은 윤호중 사무총장의 사과를 강력하게 촉구한다.”[2]


    더불어민주당 윤호중 사무총장의 발언에 대한 녹색당의 규탄은 어떤 면에선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대의민주주의가 채택된 이래로 국회운영의 본은 민중주의(포퓰리즘)여 왔고, 그러한 체제 하에서 정당 또는 개인의 이념 혹은 가치 등은 ‘소모적’이고 불필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거대 양당은 이념이라는 기표를 현재에 이르기까지 적절히 이용하여 그 세를 부풀리고 유지해왔다. 그러나 그간의 정쟁에서 그들이 서로에게 겨눈 무기에 붙여진 ‘이념’이라는 딱지는 거짓된 기표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언어는 언제나 대중에, 특히 ‘다수인’ 대중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의 다수성이란 모호할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좀먹는 체제는 정치적 성공을 거두어 왔다. 다수는 언제나 ‘무엇의 다수’라는 의미에서 가능하며, 그 ‘무엇’을 적절히 변형시킴으로써 그들은 하나의 시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적 죽음을 맞으나, 다른 어떤 의미에선 극적인 부활을 꾀할 새로운 논리를 제공받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점에서 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신념 혹은 기치로 삼는 바는 불분명하게, 그리고 그 반대자의 공격으로부터 언제나 회피 가능하고, 사실상은 그들과의 융화까지도 가능한 정도로만 형성되고 말해진다. 윤호중 사무총장을 옹호한 같은 당 최민희 전 의원의 언어는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말씀하신 것 중에 민주당이 성소수자 정책에 선진적이다 혹은 뭐 앞장선다, 그건 아닙니다. 민주당이 이제 그 차별금지법 때문에 이렇게 된 거예요. 그 차별금지법은 성소수자도 차별금지의 대상이냐 아니냐를 얘기한 겁니다. … 여기에 들어가냐 마냐로 이제 특히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공격이 많았던 건데요. 그럼 성소수자를 차별해도 되냐, 저는 미래통합당도 차별에는 그렇게 동의할 것 같지 않아요. … 그 정도인데, 그게 너무 잘못 알려졌다, 그런 느낌이고요.”[3]


    성소수자 인권—그들에게는 성소수자 인권이기보다는 성소수자 ‘문제’이겠지만—은 이러한 거대 양당의 전략적 모호성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주제이다. 그리고 이는 시민사회에서 그에 대한 유의미한 이의가 발생하는 한은 계속될 것이다. 이 같은 정치적 모호성은 대부분의 정치적 안건에서 확인 가능한 것인데, 이 같은 양상은 그들 정치인들의 이념 결여 상태를 잘 보여준다. 누군가는 이념의 결여를 정치인의 좋은 덕목으로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이렇게 물어보자, 이념 없는 정치인은 무엇/누구를 대표하는가? 이 질문은 마치 이념 없는 인간이 존재하거나, 최소한 그 같은 인간상이 마치 장려될 만한 것이라고 상정하는 듯하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이념을 지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자신의 이념을 통하여 살아간다.


    그런 점에서 거대 양당이 구성해온 한국 국회의 현 체제는 대의민주주의의 표면적인 의미에도 불구하고 시민의 어떤 부분을 대리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만일 그들이 대변하고 있는 것이 최소한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세대와 세대, 계층과 계층 간의 서로에 대한 증오에 불과할 것이다. 금번의 양당 간 비례정당 창당 경쟁이 이러한 사태를 잘 보여주는데, 그들의 언어에서 서로에 대한 증오를 지우면 그들 행위를 정당화할 어떤 논리도 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증오의 선거 구도를 개혁할 시기가 한때는 있었으나 더불어민주당의—당시 자유한국당과 거의 동일한—항상성의 욕망은 그 개혁의 의미를 퇴색시켰고, 실상은 그 붉은 당의 꼼수와 자신들의 연 이은 헛발질을 촉발하였다.


    시민을 대표하지 않는 국회에 이념은 없기에 ‘이념을 넘어서자’라는 정치인들의 상투적 표현은 성립하지 않는다. 더불어민주당은 선거개혁의 지속을 미끼로 소수 정당들을 유혹—실상은 협박—해왔으나, 그들의 본성에 걸맞게도, 과감한 개혁의 당연한 불발에 대한 어떠한 유감표현도 없었다. 국회가 시민들의 다양할 수밖에 없는 의견충돌의 장이 되는 것을 그들은 두려워할 터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수록 그들의 이념 결여 상태는 스스로의 발목을 잡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여운 것은 자신들이 양분된 정치세력 중 하나에 반드시 소속되어 있고 소속되어야 한다고 믿는 수많은 시민들 뿐이다. 국회가 집단 간 증오에 좀먹기를 그만두고 시민들의 다양을 어떻게든 대리하고자 한다면 그 빛깔이 두 가지에 그쳐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1] https://www.youtube.com/watch?v=ZNxGofgNNCc

[2] 녹색당은 2020년 3월 17일 ‘윤호중 사무총장의 성소수자 혐오발언 규탄한다'라는 제 하에 논평을 발표하였다.

[3] https://www.youtube.com/watch?v=Snav9fjaxrs&t=8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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