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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니스트리 Sep 16. 2023

이 모든 길의 시작

강원도 태백에는 한강의 발원(發原)인 검룡소(儉龍沼)가 있다. 검룡소는 아직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儉龍)가 사는 못(沼)이란 뜻으로, 한강으로 모이는 수많은 물줄기 중 첫 번째가 시작되는 곳이다. 여기서부터 정선 아우라지까지의 코스는 대체로 평탄한 길이다. 그 길을 마치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경쾌히 내리 달리며, 자전거와 함께한 감사한 날들의 시작은 검룡처럼 여전히 채 피어나지 못한 내가 머문 그날임을 깨닫다.




“어디까지 다녀오셨어요?”


새로운 취미를 시작했다는 아버지는 무려 잠실까지 자전거로 다녀왔다며 뿌듯해하셨다. 방배동 댁에서 한강변 잠실 선착장까지는 자전거길로 왕복 20km 정도의 거리다.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먼 곳을 자전거로 다녀오시다니, 평소 체력이 좋은 아버지라서 가능한 일이라고 여겼다. 가족들도 모두 ‘잠실을 자전거로?’라며 놀란 반응이었다. 하지만 자전거 자체에 큰 관심이 없고, 평소에도 아버지의 여러 기행들에 면역이 생긴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감탄의 여파는 크지 않은 듯했다. 유독 아버지의 새로운 취미와 성취에 눈이 반짝인 건 나 자신이었다.


아버지는 거의 매일 동네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며 건강을 관리해 오셨다. 흔히 '강골'이라 불리는 사람들처럼 건강한 몸을 타고나신 데다 음식을 짜지 않게 섭취하는 식습관도 유지 중인 아버지는 동년배 어른들에 비해 훨씬 젊어 보인다. 자전거는, 그런 아버지에게 날개가 되어 헬스장을 벗어나 길이란 이름의 더 넓은 운동장으로 나가게 한 존재였다. 당시 해외에 거주하며 가끔 안부 전화를 드릴 때면 아버지는 당신의 자전거 무용담을 들려주시며 말미에는 늘 ‘한국에 오면 같이 가자’고 말씀하셨다. '언젠가는'이라며, 그날을 기대하던 날들이었다.



패드가 달린 바지


“이걸 꼭 입어야 해요?”


비로소 아버지와 함께 처음 한강을 달릴 기회가 있었다. 아버지는 엉덩이 쪽에 하트모양의 쿠션이 붙어있는 바지를 입으라고 건네주셨다. 종아리가 좀 끼는 느낌이 들었고 패드 때문인지 왠지 엉거주춤해 보이는 그 바지는 처음에는 착용감이 영 어색했다.


"안장통이 있을 거야. 그거 입으면 좀 덜 해"


안장통이란 자전거를 오랜 시간 타다 보면 올 수 있는 엉덩이와 사타구니의 통증이라 하셨다. 어릴 때 타던 자전거의 크고 두툼했던 안장과는 다르게, 경기용 자전거는 뾰족하고 다소 딱딱하게 생겼다. 패드 바지를 입자 엉거주춤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일이겠지만, 기저귀를 찼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거기에 아버지는 화려한 무늬의 셔츠도 주셨다. '저지(jersey)'라고 부르는, 뒤에 주머니가 셋 달린 탄력이 있는 자전거용 기능성 옷이었다. 그걸 입고 헬멧과 장갑도 착용했다. 그리고 동생이 방치해 바람이 다 빠져 있는 MTB 자전거에 바람을 넣었다. 안장 높이를 조절하니 그럭저럭 탈만한 자전거가 되었다. 일상용 자전거와 달리 운동으로 타는 자전거는 나가기 전 준비할 것이 많았다. 하지만 귀찮은 느낌은 아니었다. 준비 과정은 오히려 뜸 들이는 시간과 같아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안장에 올라 아버지와 집을 나섰다. 아버지는 출발 전에, 공도를 달릴 때는 우측 끝차선 절반 정도를 자전거가 달릴 수 있고 좌 우 방향을 전환할 때는 손으로 신호를 한다는 등의 몇 가지 도로의 법칙을 알려주셨다. 오랫동안 자전거를 타지 않았지만 몸으로 익힌 것은 쉬 잊히지 않으니 타는 것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반포천부터 시작되는 자전거 전용도로로 진입하기 전까지는 차와 도로를 공유해야 했다. 자전거로 가다 보니 익숙한 동네의 공기마저 다르게 느껴졌다. 10분 정도를 달려 반포천 자전거길로 들어서자 저녁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더는 차가 없어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원래 자신보다 빠른 존재가 불편한 법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방심은 안된다 하셨다.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는 오히려 차가 아니라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할 수 없는 사람과 반려동물이라고.


반포천을 지나 도착한 한강변은 자취를 감춘 해의 흔적으로 어스름했다. 페달을 밟아 앞으로 나아가자 기분 좋은 미풍이 온 얼굴로 날아들었다. 경험하지 못한 진정한 해방감과 같았다. '어둠이 온다, 새 빛을 맞으라'는 듯 기세 좋게 켜진 가로등은 하늘빛이 물러가자 당당히 길을 밝힌다. 그 길 위에서 아버지 뒤를 따라 동에서 서로, 여의도를 향해 사뿐히 한강을 달리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타자면 에너지가 필요하고, 에너지를 얻고자 힘을 쓰면 심장이 더 빨리 뛴다. 설렘이나 불안도 심장을 빨리 뛰게 한다. 자전거를 타면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게 심장이 빨리 뛰지만 이상하게 그게 잘 느껴지진 않는다. 같은 박동도 기분이 달라 의아해하며 기분 좋은 열과 땀, 그리고 규칙적인 호흡이 만든 엔도르핀을 마음껏 즐긴다. 이 모든 것들의 조화 속에 반복되는 카타르시스는 무한대(∞)를 닮은 바퀴의 구름과 함께 오고 있었다.


이 한 번의 라이딩은 이후 일상에서도 종종 회상될 만큼 큰 여운이었다.



지나갈게요


"자꾸 뒤에서 누가 지나가는 게 짜증 나! 로드 자전거를 사야겠어"


다음 챕터로 넘어가는 열쇠였던 걸까? 새로운 키워드 '로드 자전거'를 그렇게 알게 됐다. 자전거 도로에서 달릴 때 로드 자전거들의 추월은 아버지의 승부욕을 자극했다. MTB는 태생이 전천후 자전거라서 산악 지형은 물론 도로도 달릴 수 있다. 그리고 로드 자전거는 이름 그대로 도로에서 가장 빠르게 달릴 수 있도록 설계된 자전거다. 그래서인지 MTB처럼 오프로드에서는 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대신 속도는 남다르다. 아무리 훈련을 해도 전천후 클라이머가 육상 선수보다 평지에서 빠르긴 어렵듯, MTB도 로드 자전거보다 느린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자꾸 추월당하는 게 분하셨던지, 결국 아버지는 생애 첫 로드 자전거를 장만하셨다. 새 자전거를 자랑하는 아버지의 기쁜 마음이 새 자전거를 선물 받은 어린 아이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어린이 자전거가 빛나는 곳은 골목 (요즘은 아파트 단지)이고, 로드 자전거가 가장 멋지게 달릴 수 있는 곳은 포장된 도로다. 그동안 아버지는 MTB로 꾸준히 운동하셨고, 그렇게 갖춘 사이클 DNA로 로드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셨으니 로드로 처음 입문하는 사람들보다는 더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이후, 함께 타는 동료들을 만나 일취월장한 아버지는 동부 5고개, 화악산, 대관령, 4대 강 국토 종주까지 로드 자전거로 갈 수 있는 거리와 오를 수 있는 높이의 한계를 계속 넘으셨다.



독수리 형님


헤르메스의 날개와 같이 로드 자전거는 아버지를 더 자주, 더 빠르게, 더 멀리 데려갔다. 그리고 아버지는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만났다. 처음 아버지가 자전거를 구입한 반포의 한 바이크 전문점에는 자전거 모임이 있었는데, 이 모임에서의 단체 라이딩은 아버지에게 함께 달리는 자전거의 참 재미를 알게 했다. 당시 흔치 않던 에어로 헬멧을 쓰고 다니던 아버지는 도로 위에서 그 존재감이 남달랐었다고, 당시부터 함께 하는 아버지의 자전거 동료는 회상한다. 거의 매 번의 단체 라이딩에서 늘 선두를 지키며 리더십을 발휘한 아버지는 헬멧의 독수리를 닮은 모양 때문에 '독수리 형님'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께서 이끄는 무리의 행렬을 사람들은 ‘독수리 열차’라 칭했다고.


'독수리 형님'이 지나가면 뒤로 긴 행렬이 생기기도 했다고



점점 더 멀어져 간다


귀국 후에 한 달에 한두 번은 아버지와 함께 자전거를 탔다. 팔당, 행주산성, 그리고 한강의 서쪽 끝에 있는 아라갑문도 이 시기에 다녀왔다. 매 번의 라이딩 끄트머리 난관은 언덕 위에 위치한 집이었다. 이미 다 소진한 힘의 나머지를 쥐어짜듯 꾸역꾸역 오르고 나면, 힘들었던 만큼 미션 완료의 성취감은 컸다.


라이딩을 할 때 아버지는 새로 장만하신 로드 자전거를, 난 아버지의 MTB를 탔다. 대체로 아버지가 속도를 조절하며 이끌어 주셔서 함께 달리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다가 깨닫게 됐다. 라이딩에서, 두 사람의 속도가 맞지 않으면 앞선 이와 따르는 이 모두 답답할 수 있다는 것을. 자전거의 엔진은 심장과 두 다리라서, 한계를 돌파할 때뿐만 아니라 속도를 낮춰 갈 때에도 자제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일까, 코스 중 어쩌다 만나는 직선 길에서 아버지는 뒤를 잊은 듯 달려 나가곤 했다. 이러한 아버지의 해방의 질주에 할 수 있는 거라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의 가사를 읊조리는 것뿐이었다.


어느 날 서울에서 춘천으로 가는 100km 이상의 라이딩을 할 때, 도저히 완주할 수 없을 것 같아 대성리 역에서 기차를 타고 목적지까지 가게 된 일이 있었다. 라이더들이 '점프'라고 부르는, 그다지 명예롭지 않은 이와 같은 선택을 하며 슬그머니 ‘로드 자전거를 사야 할까’라는 생각을 했다. 장비 탓은 했지만 바로 로드 자전거의 구매로 이어지진 않았다. 사회 초년생인 데다, 한 달에 한두 번 타는 라이더에게 비싼 로드 자전거는 사치품에 불과한 듯싶었다.


그렇게 한동안은 아버지의 MTB를 탔다. 자연을 향해 자전거로 가는 멋진 경험을 위해 필요한 것이 꼭 로드 자전거일 필요는 아직은 없었기 때문이다.




산 타(는) 할아버지


돌이켜 보면 무언가를 타며 얻는 성취는 할아버지로부터 였다. 산을 사랑하셨던 할아버지는 주말마다 미취학 어린 손자의 닭발 같은 손을 잡아 이끌어 관악산으로 데려갔다. 대체로 해가 뜨기 전 새벽에 출발해 산 중턱쯤의 마당바위에서 바라본 도시의 일출은 어린 눈에도 웅장함 그 자체였다. 산은 참 좋았다. 오르며 만나는 사람들과 인사도 하며 오르는 할아버지는 누군가 물을 때면 꼭 ‘이 녀석이 내 손주’라며 자랑하듯 말씀하셨다. ‘어이구 기특하네’ 라거나, '산 잘 탄다'는 사람들의 칭찬이 좋아 할아버지를 따라 더 열심히 올랐다. 오르다 보면 어느새 만나게 되는 약수터는 또 다른 산행의 즐거움이었다. 바위틈으로 흐르는 톡 쏘면서도 시원한 물의 청량감은 까불다가 넘어진 아픈 고통도 씻어내기에 충분했다. 할아버지께서는 그런 손주가 자라 사회에 나가기 전에 돌아가셨다. 지금도 산에 오를 때면 할아버지가 그곳에 없어 허전함과 그리움을 함께 느끼곤 한다.


나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강골은 아니어서일까, 해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며 스트레스가 제법 컸던지, 아니면 건강 관리를 소홀히 한 탓인지 같은 나이대에선 드물다는 병을 앓았다. 치료와 회복을 반복하는 사이 체력은 많이 약해졌다. 이후 별다른 운동을 하지 못하다가 아버지와 함께 자전거를 타며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헬스장에서는 재미를 느끼지 못해 자주 찾지 않았다. 산이 그랬듯, 자전거를 타고 나갈 동기와 이유는 길 위에 충분했으므로 아버지와 더 자주 타게 된 것 같다. 병의 후유증으로 한쪽 귀의 청력을 거의 잃고 이명과 염증에 시달리는 나날이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게 된 건강한 심장과 튼튼한 두 다리는 여전히 제 일을 열심히 해주고 있다.


할아버지께서 데려가 주신 산에서는 일출을,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신 길에서는 석양을 보았다. 그리고 자전거는 일깨워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얻은 유산은, 자전거로 경사가 가파른 언덕을 오르며 꼭대기에 닿기 직전 30초 정도에도 필요할 살면서 어찌어찌 잘 버텨내는 힘일 거라고.


내일 모레 칠순인 아버지(우)와 나, 그리고 아버지께 물려받은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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