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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니스트리 Sep 12. 2023

백두대간을 달리다

2017년 9월 어느 날의 기억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儉龍沼)’는 백두대간 중 대덕산과 함백산 사이의 금대봉 자락 해발 800m 고도에 위치한다. 꽤 높은 고도 덕분에 태백의 검룡소에서 정선 아우라지에 이르는 길은 대체로 내리막이거나 평지다. 이날의 동행은 회사의 사내 자전거 동호회 사람들이다. 주말을 회사 동료들과 함께 보내는 것이 요즘 트렌드는 아니나, 자전거, 야구, 축구, 캠핑과 같은 동호회는 평일에는 현실적으로 하기가 어려워 더러 모임을 주말에 갖기도 한다. 무려 '백두대간을 회사 동호회 사람들과 함께 자전거로 달린다'는, 의미마저도 남다른 원정 라이딩을 떠난 날은 서울에 비가 내리던 9월의 어느 주말이었다.


날이 조금씩 밝아오는 오전 6시에 서울에서 미리 예약한 버스에 자전거를 싣고 강원도 태백을 향해 출발했다.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지만 강원도 현지의 날씨 예보는 강수 확률이 낮아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휴게소에서 잠시 쉰 시간을 포함해 4시간 정도를 꼬박 이동하여 검룡소 앞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에 실었던 자전거를 내리고, 각자 자신의 장비를 살피며 출발 전 준비를 한다. 장비 점검이 끝나자 오전 11시 정도가 되었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지만 날은 흐렸고, 바람은 거세게 불고 있었다. 바람은 자전거의 친구이기도, 적이기도 하다. 순풍이라면 신나게 내달리는데 도움을 주지만 역풍이나 측풍은 체력을 갉아먹는다. 특히 산에서 부는 바람은 방향이 일정치 않아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가장 큰 장애인 비 사정이 괜찮아 우선 출발하기로 한다. 모임의 경력자가 주의사항을 알렸다. 앞사람과의 거리를 너무 좁히지 말 것, 내리막 위주의 코스이므로 선두의 신호가 있기 전까지 되도록 앞사람을 추월하지 말 것. 급제동이나 급선회를 삼갈 것 등이다.


코스의 전반부 태백-임계 47km의 기록




목적지까지의 거리는 70km, 누적 획득고도(총 오른 높이)는 214m로 코스는 무난한 수준이었다. 하루에 1000m의 누적 획득고도가 넘는 코스가 경기도권에도 많아 상대적으로 수월한 코스로 예상되지만, 대부분의 오르막이 후반부에 몰려있다는 사실은 유념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 날은 서포트카(라이딩 시 전후방에 위치하며 무리를 에스코트하는 차)가 있어 길을 잃을 가능성은 적었다.


처음엔 일행의 선두로 나섰다. 사실 아직 초심자에 불과했으나 나이가 가장 어렸고, 체력이 좋아 보인다는 선배들의 선입견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다할 일도 아니다. 가장 앞에서 달려본 적이 많지는 않지만, 일행을 이끈다는 것 또한 경험이고 라이딩의 색다른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물론, 바람의 저항을 가장 세게 받는 데다 페이스 조절에 실패할 경우 스스로뿐만 아니라 여럿을 힘들게 할 수 있어 세심함이 필요하다. 자칫 잘못하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0칼로리에 배만 부른 욕을 더 많이 먹게될수도 있다. 따라서 지혜로운 이들은 앞으로 잘 나서지 않는다. 대부분이 경력자인 경우 선두 교체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 라이딩에 초보자는 나 하나였다.


검룡소에서부터 -2-3도 정도의 내리막을 신나게 달렸다. 땅이 조금 젖은 것 말고는 괜찮았다. 다리가 가볍다고 느껴져 더 밟았다. 자전거는 힘을 누적해 앞으로 가는 도구이므로 가속도가 생기면 어느 정도의 힘을 더하고 덜하는지 가늠이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엔 파워미터(power meter)라는 것을 많이 쓴다. 속도는 사실 경사도, 바람의 방향과 세기, 노면의 마찰 상태 등 다양한 변수에 따른 상대적 지표이므로 온전히 체력 소모량을 측정하기 위해 일정 시간동안 발생되는 파워를 와트(watt)단위로 측정하기 위함이다. 파워미터가 보편화 되며 이젠 좀 더 전략적으로 타는 라이더들이 많아졌다.


파워미터는 익숙해지면 선두에서 무리를 이끌 때도 유용하다. 일행 중 초보자의 경우 어느 정도 이상의 파워는 힘들 것이므로, '최대 몇 와트를 넘기지 말아야지'와 같이 그 상한선을 정해두고 이끄는 식이다. 오랜 경험과 경력이 있어야 파워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다. 당시 내 자전거에는 파워미터가 없었다. 당연히 FPT라 불리는 자신의 최대 한계파워 (한 시간 동안 유지할 수 있는 파워)도 알지 못했으므로, 다리가 가벼우면 '오늘은 컨디션이 좋네'라며 나중 생각 안 하고 막 달려 마지막에 지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대체로 초심자들이 자주 그런다) 주위 경관도 좋고, 날은 시원하고, 바람은 조금 불었지만 그래도 내리막이니 거침 없이 나아갔다.



더, 더, 더를 마음속으로 외치며 한동안 신나게 달리는데 뒤에서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다. 귀 주위의 공기 마찰음 때문에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너무 빠르다!'는 이야기 같았다. 잠시 속도를 줄이고 나니 다른 동료가 선두를 바꾸자 한다. 페이스 조절이 필요할 것 같다고. 나중 이야기지만, 스스로 감당 못할 만큼 속도를 끌어올린 탓에 뒷사람도 힘들고, 선두에서 바람의 저항을 오롯이 받은 나도 힘들어 경사가 몰려있는 후반부에는 그야말로 기듯이 설설 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점심을 먹기 전 약 한시간 반의 주행은 속도가 빨랐고, 즐거웠다. 점심 장소까지 예상보다 빨리 도착해 밥을 먹고 물통도 채웠다.


자전거 세계에서 먹는 행위를 ‘보급’이라 한다. 왠지 군대식 용어 같지만 사실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도 없어 보인다. 자전거는 너무도 정직한 운동이라서, 안 타면 체력이 줄고 먹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다. 식사 후 남은 거리는 22km 남짓으로 괜찮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오르막에선 그 끝이 늘 요원하다. 초반에 힘을 아끼지 않은 대가는 컸다. '자전거는 정말 정직하다니까'.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가 축 처진채 말하는 듯했다. 힘을 안배하는 것이 실력이고, 그 실력은 부족한 체력을 채우기도 한다. 그래서 노련한 라이더는 자신의 한계를 알고 결코 처음부터 무리하지 않는다.


어떻게 어떻게 기듯 오르고 다리를 쉬며 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인 정산 아우라지에 도착했다. 그 사이 오르막에선 각자의 실력대로 선후가 벌어지게 마련이므로, 흩어졌다 모였다 하며 낙오자 없이 함께 도착하게 됐다. 마치 검룡소에서 흐르는 물이 한강에 닿아 모이듯, 달리다 흩어졌던 일행도 목적지에선 모여 힘듦을 성취로 바꿔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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