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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니스트리 Sep 24. 2023

바람보다 거센 바람

자전거로 제주도 한 바퀴 돌기 (1/2)

※2년 전 오늘의 이야기 입니다

두 바람은 거세게 부딪히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는 이들의 한결같은 바람인 순풍과, 제주도에서 마주할 것이 분명한 거센 역풍. 그런데 아마도, 바람 무서워서 제주도에 자전거를 타러 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남들은 ‘그 고생을 왜 사서 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의 바람(hope)은 언제나, 부는 바람보다 더 거세다.




'119 라이딩'


그게 포스팅의 제목이었다. SNS를 통해 접한 건, 운동을 가끔 같이 하던 C의 사고 소식이었다. 자전거는 무리하게 타면 사고가 날 가능성이 크다. 이번 사고는 타인에 의한 어찌할 수 없었던 상황으로 보인다. C와는 여행의 추억이 많아 안타까움이 컸다. 쇄골이 부러져 수술을 마쳤고, 재활하자면 몇 주 혹은 몇 달이 걸릴 것이라고 한다. '그만하길 천만다행이야'라는 말로는 위로를 건네지 않았다.


"얼른 낫자"


좋아하던 운동을 계속하고, 또 기회가 되면 다시 멋진 자전거 여행을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 마음을 네 글자에 담았다. 그러면서 C와 함께였던 자전거 여행이 떠올랐다. 몇 있었는데, 그중 이 계절에 떠난 제주도 한 바퀴 돌기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어려움의 연속이었지'


바람, 고장, 더운 날씨, 예상치 못한 깔딱 오르막 등등 … 그럼에도 이 여행이 좋은 기억이었던 이유는, 그 시련이 대체로 극복 가능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사고로 다친 이도 아무도 없었다.


‘행복했다’라고 할만한 자전거 여행은 바람이 없는 맑고 고요한 하늘이 만들지 않는다. 그 기억은, 함께한 이들의 안전을 위한 노력과 협조, 그리고 약간의 행운이 주는 선물과도 같다.






“제주도 한 바퀴 콜?”


앞뒤 다 자르고, 첫마디에 제주도까지 자전거를 타러 가자고 하는 이 멋진 친구는 즉흥 여행의 낭만을 아는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면 이 친구와의 자전거 여행은 이런 식으로 떠나곤 했다. 그리고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그래, 가 보자!"


C의 쿨한 제안에 콜이라 답하고, 바로 그날 제주도로 가는 국내선 비행기표와 자전거 화물 포장 서비스를 예약했다. 예정한 날까지 일주일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바람이 많은 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섬 제주도는 넓은 타원형이다. 얼핏 보면 알고구마처럼 생기기도 했다. 밀대로 밀다 실패한 만두피 갖기도, 혹은 바닥을 긁으면 나올 수제비의 마지막 조각 같기도 하다. 어쨌든, 먹을 걸 닮은 제주도는 음식으로도 유명하다. 갈치조림, 고등어(회), 고기국수, 물회, 흑돼지와 같이, 없어 못 먹는 유명한 음식들 뿐만 아니라 내가 정말 좋아하는 바다의 풍미 가득한 ‘보말죽'도 있다.



제주도는 살면서 두 번쯤 가봤다. 그런데 매 번 차로 다녔지 자전거를 타고 여행해 본 일은 없었다. 그러나 맑은 하늘, 끝없이 펼쳐진 바다, 뒤로 보이는 한라산의 장관과 다양한 먹거리까지, 지인들의 SNS 인증 맛집 제주도는 언제나 버킷 리스트 속 1순위 자전거 여행지였다. 자전거를 타는 이들에게 제주도의 매력은 여행자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내륙보다는 잘 보존된 자연환경과 너른 바다, 그리고 산까지. 제주도에는 천백(1100) 고지라고 부르는 극한의 한라산 오르막길이 있고, 외곽으로 한 바퀴 돌 수 있는 해변 둘레길도 있다.


하지만 기회를 만들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자전거를 함께 타던 동생 C가 이런 멋진 제안을 해 드디어 가 보게 된 것이다. 멋진 경험은 때때로 이렇게 불현듯 시작된다.


C가 말한 코스를 지도에서 찬찬히 살펴본다. 무난해 보였다. 요즘엔 기술이 좋아서 지도 위에서 미리 전반적인 난이도를 살펴볼 수 있다. 우리가 타려는 제주도 외곽의 국도는 한 바퀴가 190km 정도의 거리이고, 획득 고도(누적된 오르막길 높이의 합)는 1000m 남짓이다. 당시는 체력이 물이 오를 대로 올라 하루에 2-300km의 거리도 거뜬히 달리던 시기였으므로 이 정도면 쉬운 코스에 속했다. 하지만 제주도에는 중력 말고도 라이더가 극복해야 할 존재가 있다. 중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제주도에 많다는 ‘바람’이다.



챙길 것과 버릴 것


가는 방법과 운송 수단이 마련되면 자전거 여행의 준비는 거의 다 끝난다. 출발 하루 전 저녁에 다음날 여행 준비를 했다. 아침 일찍 시작해 저녁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시 비행기로 돌아와야 하는 일정으로 공항에서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입을 계획을 세웠다. 날씨는 많이 덥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도 탈진에 대비해 비상식량인 에너지 젤과 포도당 캔디 등도 챙겼다. 자외선 차단제도 필수다. 장거리 자전거 여행에는 상의 주머니에 휴대할 수 있는 고체형 스틱 차단제가 유용하다.


필수 안전장비인 헬멧과 고글, 그리고 장갑을 챙겼다. 마지막으로 자전거용 슈즈를 가방에 넣고, 자전거 물병과 간단한 정비를 위한 공구도 잊지 않는다. 자전거 타이어의 바람은 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전거 타이어가 높은 고도에서 지상과의 기압 차이로 인해 폭발해 문어라면만 먹고 돌아와야 할 수도 있다.


준비를 마치고 늦은 밤 잠을 청한다. 하지만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언제나 여행 전날엔 기대감에 잠을 통 이루지 못하고,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눈이 일찍 떠진다. 이건 학창 시절 기억의 첫 소풍 전날밤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설렘 불면증’ 때문이다. (설렘 불면증은 그냥 내가 지은 증상명이다) 겨우 잠이 들었나, 그 짧은 시간 꿈을 꾼 것도 같다. 알람 소리를 꿈에서 듣고 일어나 주섬주섬 꺼내둔 옷을 입는다. 챙길 것이 많은 자전거는 평소 게으른 여행자를 준비성 철저한 개미로 만든다.


아직은 어두운 이른 시각 네 시. 약속 시간에 맞춰 집 앞으로 짐과 자전거를 가지고 나간다. 거의 비슷한 시간에 집 앞으로 데리러 와 준 C의 차에 자전거를 싣는다. 계획은 공항에 5시까지 도착하고, 자전거를 포장해 화물로 부치고 6시 30분 비행기를 타는 것이었다. 공항에는 5시가 되지 않아 도착했다. 이른 시간인데도 공항에는 사람이 많았다. '사람들 참 부지런하네', 하고 생각했다. 물론 우리도 그들 중 하나였다.


자전거를 포장하기 위해, 서비스 업체에서 안내한 김포공항 내 위치에 도착했다. 5시 30분이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곳엔 우리 말고도 많은 라이더들이 자전거를 열심히 포장하고 있었다. 제공된 규격화된 상자에 자전거를 포장하며, 모르는 것은 상주하는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시스템이다. 자전거를 포장하자면 안장과 앞바퀴를 분리해야 했다. 그런데 안장과 프레임을 연결하는 ‘시트포스트(seatpost)’라는 부품을 분리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내 자전거의 시트포스트에는 일반적이지 않은 규격의 나사가 쓰여 챙겨 온 범용 공구로는 분리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이없는 실수였다. 직원에게 혹시 해당 규격의 렌치가 있냐고 묻자 이리저리 찾아보더니 한참 뒤에 내어줬다. 그 사이 난, C의 자전거 포장을 도왔다.


뒤늦게 시작한 자전거 포장을 마치고 시계를 보니 탑승 시간까지 대략 35분이 남아 있었다. 짐을 부치고 체크인을 할 차례였다. 대기 줄이 길 수도 있어 빠른 걸음으로 체크인 접수처로 이동했다. 접수처 가까이 갔는데 이상하게도 줄을 선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기분이 싸했다.


“수속장 마감 했는데요”


직원이 우리를 막아서며 말했다.


“네? 저희 6시 20분 비행기인데 …”


“이미 마감했어요. 비행기 탑승은 가능한데, 짐은 못 부치세요”


난감했다. 직원에게 사정해 보았으나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자전거를 두고 몸만 가야 하나 라는 이상한 생각을 잠시 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우리는 바로 현장에서 약 30분 뒤에 뜨는 다음 비행기를 예약했다. 이미 출발해 버린 비행기의 티켓 값은 돌려받지 못했다.


포장을 마친 자전거들


그렇게 대체 항공편을 타고 제주도에 도착한 시간은 8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비행시간만 1시간 1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비행기만 타면 1시간 정도에 가는 제주도는, 그러고 보면 내륙의 다른 지방과 비교했을 때 자전거를 가지고 여행을 가기에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어나는 제주도 여행 수요에 맞춰 자전거 포장 서비스도 생겼으니, 가장 번거로운 자전거 운송도 어느 정도는 해결되는 셈이다.


김포공항에서 체크인할 때 화물로 부친 자전거는 일반 수화물과는 달리 별도로 마련된 공간에서 받았다. 자전거가 든 상자를 카트에 싣고, 박스 반납 장소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분해했던 자전거를 꺼내 다시 조립했다. 자전거 점검과 짐 보관을 마치자 9시가 가까워졌다. 물병과 핸드폰, 자전거에 달린 여러 안전장비들, 헬멧, 고글, 장갑, 선블록, 신용카드 … 이런 것들이 있어야 할 곳에 제대로 있는지 확인했다. 오늘 여행의 첫 챕터에 있었던 사소한 오류에 대한 책임이니 후회와 같은 감정들은, 앞으로의 여행에 걸리적거릴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들이라 가져가지 않았다.


그리고 9시가 조금 넘은 시간, 공항을 나와 페달을 밟으며 ‘자전거로 제주도 한 바퀴’ 여행이 시작됐다.



끌리는 방향으로


우리가 선택한 방향은 시계 반대 방향이었다. 우리는 제주도 북쪽에 위치한 공항을 나와 서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사실 달리기 전 잠시 고민이 되었었다. 시계 방향으로 달릴지, 아니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달릴지에 대하여. 바람의 방향은 동풍이었다. 어느 방향으로 달리느냐의 차이는 조삼모사와 같았다. 당시 바람의 방향에 의해 시계 방향을 선택하면 초반에 맞바람을 심하게 겪을 것이고, 대신 후반에는 비교적 수월할 것이다. 만약 시계 반대방향이라면 초반에 수월하고 후반에 체력 소모가 심할 것이다. 고민은 길지 않았고, 우리는 뒤를 돌아볼 새 없이 서쪽으로 나아갔다. 후반의 어려움은 해 질 무렵 성산의 멋진 풍경이 보상해 줄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영화 속에서 활시위를 당기던 박해일은 말했다.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자전거 여행은 언제나 끌리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2부 <환상이라 불리는 길>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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