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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리안 Mar 08. 2023

전문성, 개나 주라고 해

작년 말에 한껏 회사 블라인드를 뜨겁게 달구었던 주제는 '전문성 평가'였다. HR 담당에서 1년간 열심히 준비해서 오픈한 시스템이었다. 직급이 모두 평준화된 현시점에서, 각 개개인의 역량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여, Outperformer에게는 적절한 보상을 주고, Underperformer에게는 그들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는 교육을 제공하겠다는 취지였다. 좋지 아니한가?


그렇게 해서 새롭게 오픈된 스스템에서 각자 개인 역량 평가를 했다. 나만 나를 판정하면 주작 가능성이 있으니, 타인의 평가도 필요하다. 그래서 팀장이 각 팀원의 역량 평가도 해주었다. 그리고 한 달 뒤 결과가 오픈된 후 대 난투극이 벌어졌다. 


전문가 레벨 1~5로 나눠진 시스템은, 예외 없이 '선임=전문가1, 책임=전문가2, 팀장=전문가3, 연구위원=전문가4, 담당/임원=전문가5'로 매칭되었다. 변별력이 없는 시스템을 왜 애써 돈 들여 일 년이나 만들었냐부터, 전문가 레벨 별로 성과급을 준다고 했으니, 결국 지금도 돈을 많이 받고 있는 임원/담당/연구위원들만 더더더 보상을 받게 되는 것 아니냐는 불만까지.. 블라인드가 터져 나갔다.


나는 크게 괘념 치는 않았다. 책임연구원으로서 전문가 몇까지 나오나 궁금해서 상당히 overestimated 한 자뻑 결과를 넣어봤는데, 역시나 레벨 2가 나왔다는 점이 좀 자존심 상했지만. 적절한 보상을 준다고 하고서 들어온 월급봉투가 이전 달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아 두 번 자존심 상했지만.


그보다는 전문가가 왜 되어야 하냐라는 질문에 봉착했다. 어떤 전문가가 되라는 말인가. 어디까지 해야 전문가라는 말인가. 책임인데 레벨 3~4를 찍으면 전문가인가? 그러고도 팀장/담당이 아니면, 여기 있음 안되는 거 아닌가? 최근에 읽은 책에서 이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


두 가지 분야에서 상위 25퍼센트에 들 수 있는가?
뭔가 남다른 삶을 원한다면 선택 가능한 길은 두 가지다. 첫째, 특정한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것. 둘째, 두 가지 이상의 일에서 매우 뛰어난 능력 (상위 25%)을 말휘하는 것이다. 첫 번째 전략은 1등의 몫이다. 1등이 아닌 사람들에겐 불가능하다. 될 수만 있다면야 최고의 선택이겠지만 평번한 사람들에겐 쉬운 목표가 아니다. 두 번째 전략은 비교적 쉽다. 누구나 일정한 노력을 기울이면 상위 25퍼센트까지는 올라갈 수 있는 분야가 적어도 두 개 정도는 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에 이 연습으로 얻은 재능까지 보내지면 어느 날 갑자기 한 가지 기술만 가진 사람들의 리더가 될 수도 있다. 두 가지 이상의 괜찮은 능력을 결합해 자신을 보기 드문 존재로 만들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1등을 이길 수 있다.
(타이탄의 도구들, P112)


회사는 구성원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1등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야 개별 구성원의 역량이 뛰어나지고, 회사의 역량도 높아지니 당연한 논리다. 하지만 개인도 마찬가지인가? 내가 회사 생활을 처음 할 때 늘 들어온 이야기가 역량을 높이라는 것이었다. 이 분야에서 네가 독보적이 되어야 한다는 말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다 헛된 이야기이다. 되면 좋지만, 되기 어렵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한 분야에서 상위 5%에 들기에는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득권의 세력이 너무도 세다. 차라리 적당히 업무 역량이 쌓이면 (상위 25%), 다른 분야로 관심을 돌리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었다. 연구 역량도 어느 정도 있는데 (A 분야 상위 25%), 외국 업체를 만나니 영어도 잘하고 (B 분야 상위 25%), 학회를 나가서 시장 조사를 시켜보니, 다른 분야에서도 아는 것이 많을 때 (C 분야 상위 25%) 그 사람이 더 돋보이지 않겠는가. 


두루두루 잘하는 사람은, 사실 그 역량이 타고남이 있다. 교회 오빠라는 말 있지 않은가. 공부도 잘하고, 농구도 잘하고, 탁구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는데, 엠티 가니 모닥불 앞에서 기타도 치는 오빠. 반면에 나처럼 태생부터 한 우물만 파는 캐릭터들은 하라고 해도 이런 스킬을 다 습득하기가 너무도 어렵다. 하물며 교회 오빠도 되기가 힘든데, 회사에서 본업 외에 부업 캐릭터를 키운 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인생의 길이 다름을 인지함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회사에서는 나의 전문성을 더더욱 높이라고 요구하지만, 나는 굳건히 영어 공부를 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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