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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폴라리스 Apr 06. 2017

들어주고 또 들어주자,
아이들의 얘기를

월간 <폴라리스> Vol.177 '궁금해, 아이의 말'

‘두 살에 한글을 뗐네’ ‘여섯 살 이전에 이중 언어를 익혀야 하네’ 하며 지금처럼 부모나 교육기관이 앞다투어 유아기 언어 능력 키우기에 열정을 쏟은 때가 또 있을까. 이럴 때 한글 낱말을 익히고 영어 노래를 외워 부르기보다단지 아이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관심을 기울이고 듣는 어린이집이 있다. ‘마주이야기’에서 말하기 교육의 길을 발견하고 26년간 마주이야기를 알리는 일에 앞장서 온 박문희 아람마주이야기어린이집 원장을 만났다. 

글 박헤나  에디터 한순호  포토그래퍼 정민재 

엄마가 웃으면 
나는 부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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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맞춤반(구 반일반) 아이들의 하원 시간이 되자 아람마주이야기어린이집 앞이 분주해졌다. 오전 시간 내내 함께하고도 헤어짐이 못내 아쉬운 아이들은 친구와 미처 못다 한 장난을 치거나 선생님과 작별 인사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생기 가득한 눈빛, 정감 어린 몸짓,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닌 아이들 사이에서 다정하고 온화한 말투로 한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 보였다. 박문희 원장이다. “아이가 심심해하는 것 같은데, 뭐든 배우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라는 물음에 “뭘 자꾸 가르치려 하기보다 심심해하게 내버려둬야 해요. 심심해야 비로소 하고 싶은 게 생기고, 하고 싶은 걸 찾아서 하게 되니까요. 대신 아이 말을 귀 기울여 들어보세요”라고 대답한다. 교육열 높은 서울 서초구에서 어린이집을 운영하며 이토록 배짱 두둑한 교육자라니. 아이의 말을 소중히 여겨 들어주고 또 들어주려 노력하는 마주이야기 전도사답다. 
마주이야기란 ‘대화’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박 원장은 “마주이야기 교육에서 말하기 교육은 들어주는 것, 글쓰기 교육은 더 들어주려고 하는 것, 아이들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은 모두 시”라고 말한다. 그냥 아이들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을 들어주고, 그 말을 더 들어주려고 글자로 쓰다 보면 시가 된다는 것. 그래서인지 어린이집 곳곳에 아이들의 말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어린이집 앞에도 전시돼 있다. 아이들 시를 오고 가는 사람, 지나는 사람이 다 들여다본다. 
“토요일에 할머니 산소 가자. / 왜? / 땅속 파서 할머니 얼굴 볼 거야? / 땅속 안 파? / 그럼 난 안 가. / 얼굴도 못 보는데 뭐하러 가.”
손태이 어린이의 마주이야기다. 제목은 ‘땅속 파서 할머니 얼굴 볼 거야’다. 땅 파서 할머니 얼굴을 볼 것 아니면 산소는 뭐하러 가냐는 아이의 맹랑한 마주이야기 시를 읽으며 어른들은 배꼽을 잡는다. 건물 앞에 걸린 ‘엄마가 웃으면 나는 부자야’라는 글귀는 태린이가 한 말이란다.
“아이가 엄마에게 ‘우리는 가난해?’ 하고 물었어요. 엄마는 ‘우린 부자도 아니고 가난한 것도 아니고 딱 중간이야’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아이가 이렇게 말하죠. ‘근데 엄마, 나는 엄마가 화날 때는 가난하고 엄마가 웃을 때는 부자야’라고요. 생각해보세요. 엄마가 화내면 아이는 얼마나 가슴이 조여들겠어요. 또 엄마가 웃으면 얼마나 어깨가 펴지고요. 아이 말은 그동안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한 것을 마음속 깊이 받아들여 삭이고 또 삭여서 나온 소리이기에, 자체가 감동스러운 시입니다.”
이처럼 마주이야기는 듣는 사람도, 하는 사람도 재미있다. 아이 말을 귀담아들으면 어른도 한 수 배우게 된다는 것이 박 원장의 생각. 그래서 원장실 책상 위에는 부모가 가정에서 아이의 말을 듣고 그대로 적은 마주이야기 공책이 차곡차곡 놓여 있다. 아이와 부모가 나눈 대화를 보고, 밑에 붙임 말을 적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과라고. 
“하루는 아이가 공책에 ‘햄 좋아한다’를 써달라고 했대요. 엄마가 그러겠다고 하자 아이가 신이 난 나머지 ‘지금 빨리 안 써주면 엄마 혼낸다!’라고 말한 거예요. 그래서 엄마가 ‘어른한테 혼낸다 그런 말 하면 안 되지!’라고 했답니다. 그걸 읽고 제가 이렇게 글을 썼어요. ‘혼낸다는 말은 어른한테 써서 안 되는 말인데, 그렇다면 어른이 아이한테는 해도 괜찮을까요?’”
우리는 아이 말을 들어주기에 앞서, 아이에게 어른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만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말하기 교육의 

길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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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이야기와의 첫 만남은 예고에 없는 우연이었다. 박 원장은 유치원을 운영하며 아이들 말하기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지 늘 고민이었다. 한때 어린이들의 말하기 교육을 한다고 웅변학원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웅변은 어른이 하고 싶은 말을 아이들로 하여금 달달 외우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회의가 들었다. 말하기 교육에 대한 관심은 동화로 이어져 동화구연대회 입상도 하고, 색동회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어른의 말과 글을 가르치는 것이 진정 아이들을 위한 말하기 교육일까?’라는 의문을 떨치기 힘들었다. 
“1986년 아주 추운 겨울날 광화문 근처를 뚜벅뚜벅 걷고 있는데 ‘글쓰기 연수’라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어요. 한글글쓰기교육연구회 모임이었는데,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솟았는지 무작정 연수 장소로 향했죠. 그런데 처음 간 날 그들이 하는 말과 이야기를 들으며 참 맑고 따뜻하다고 느꼈어요. 우리말이 가진 힘이었던 셈이죠. 2시간 모임에 참석했다가 그 길로 2박 3일 연수까지 따라갔지 뭐예요.”
참가자 대부분이 초?중등학교 교사였고 유치원 교사는 박 원장 혼자였다. 거기서 교육자이자 아동문학가인 고(故) 이오덕 선생을 처음 만났고, 글쓰기 공부 모임의 장소를 아람마주이야기어린이집(당시 아람유치원)으로 옮기게 됐다. 이오덕 선생이 자주 들렀는데, 하루는 교실을 둘러보다가 ‘적목 쌓기 영역’이라 쓴 글자를 가리키며 “박 선생님, 이거 우리말로 읽어보세요. 왜 아이들에게 어려운 한자말을 쓰지요? 나무토막 쌓기 하는 곳, 말하기 하는 곳이라고 쓰면 안 될까요? 아이들 말을 귀담아들으세요” 하고 지나가듯 말했다. 
그 뒤 이오덕 선생이 쓴 책을 샅샅이 찾아 읽다가 유아 교육에서 쓰는 말의 대부분이 한자말과 다른 나라 말임을 알았다. 유아 교육이 외국의 교육 이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우리 문장 쓰기>라는 책에서 ‘마주이야기’를 처음 접했다고.
“누워서 책을 읽다가 벌떡 일어났어요. 그토록 찾던 말하기 교육의 통쾌한 해답을 마주이야기에서 찾게 됐으니까요. 지금까지 아이들 말을 잡아먹는 거짓 글을 얼마나 기계처럼 외우게 했었는지 깨닫게 됐어요. 곧장 아이들 수만큼 마주이야기 공책을 만들어 가정에 보내 집에서 아이가 한 말을 그대로 적어오게 하는 것으로 마주이야기 교육을 시작했죠. 아이들 말을 살리고, 삶을 살려 사람답게 자라게 하고 싶었어요.”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주눅 들어 말 못하는 말벙어리, 삶과 동떨어진 거짓 글밖에 쓰지 못하는 글벙어리가 된다는 것, 말하기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르치는 게 아니라 아이들 삶이 고스란히 담긴 말을 들어주는 것. 마주이야기 교육을 해온 26년 동안 한시도 잊어본 적 없는 박 원장의 확고한 철학이다. 

"엄마, 나 유치원 가기 싫어. 애들이 안놀아줘"하면
고개를 끄덕이면서 들어주고 위로하며,
하루의 억울하고 분한 것을 다 풀게 해주세요.



말대꾸하는 아이가 
잘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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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채는 어린이집에서 순하디 순한 모범생이다.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뭐든 솔선수범해서 잘한다. 박 원장은 매달 교육비를 받으면 ‘이걸 받아야 하나. 내줘야 하나’ 하며 미안하게 여길 정도란다. 
“한번은 은채 아빠한테 ‘은채가 어린이집에서 정말 순하게 잘 지내요’ 하니, 아빠가 ‘집에서는 떼쓰고 고집부리는데요’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그러니까 잘 키워주신 겁니다. 집에서 징징거리고 울고 떼쓰고 고집부리는 걸 다 받아주니 밖에 나와서는 떼쓰고 고집부릴 일이 없는 거죠. 받아주지 않으면 그게 어딜 가나요? 아이 마음속에 그대로 눌러 뒀다가 바깥에 나와서 푸는 거예요.”
박 원장도 두 아이를 키워낸 엄마다. 칠십이 넘은 지금, 두 아들은 삼십 대 중반이 됐다. 함께 살지 않지만 간혹 아들이 툴툴거릴 때가 있단다. 그러면 ‘내가 저 녀석 어릴 때 다 못 받아준 게 있구나. 저걸 내가 받아주지 않으면 누구한테 풀까. 처자식한테 풀 텐데. 내가 받아줘야지’라고 생각한다고. 
“마음껏 말대꾸하는 아이가 자신감 있게 자라요. 현정이가 ‘엄마, 엄마는 속이 예쁜 게 좋아? 겉이 예쁜 게 좋아?’ 하고 물으니, 엄마가 ‘음… 속이 예쁜 게 좋지’라고 합니다. 현정이가 ‘딩동댕! 맞았어. 엄마, 난 속도 예쁘고 겉도 예쁜 사람이 될 거야’ 했어요. 얼마나 훌륭해요? 쉬운 일이 아닌데 마음을 먹었으니까요. 그런데 엄마가 이럽니다. ‘그런데 너 전에 고집부리고 떼쓸 때 보니 속이 밉던데?’ 아이고, 이 아이가 세상을 살면 얼마나 살았다고 과거를 끄집어내서 착하게 살겠다는 애를 약을 올리나 싶더라고요. 그런데 아이가 말대꾸를 해요. ‘엄마는 내가 다 알고 있는 건데, 안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엄마 또 그런 말하면 나 싫어!’라고. 얼마나 시원하게 말을 하던지.(웃음)”
하지만 가르치는 교육에 이미 익숙해진 아이들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마음속에 꼭꼭 담아둔 채 말하지 않는다. 가르치려는 교육 안에는 “말 잘 들어!”라는 소리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아이들 말은 들어주려는 사람은 없고, 하고 싶은 말은 못하게 하니 아이들은 속이 답답하고 외로워서 더 고집을 피우거나 떼를 쓰기도 한다. 그럼 대부분의 부모는 “어디서 고집부리고 떼를 써. 뚝 그치지 못해!”라고 호통을 친다. 그러면 아이들 마음의 병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징징거리는 것도 말입니다. 고집부리고 떼쓰는 것도 말입니다. 우는 것도 말이에요. 말해도 안 들어주면 징징대고, 징징대도 안 들어주면 고집부리고, 고집부려도 안 들어주면 울고, 그래도 안 들어주면 아이들은 아무도 날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아이가 울고, 떼쓰고, 다른 아이를 괴롭힐 때 아이를 탓할 게 아니라 아이의 말을 더 들어주셔야 돼요. 저녁에 포근하게 누워 하루 동안의 일을 다 얘기하게 해 주는 거죠. ‘엄마, 나 유치원 가기 싫어. 애들이 안 놀아줘’ 하면 고개를 끄덕이면서 들어주고 위로하며, 하루의 억울하고 분한 것을 다 풀게 해주세요.” 


"어린이 집에서 마주이야기를 해도
초등학교에 가면 안하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요?"
그럴 때마다 답은 하나다.
"즐거웠던 어린 시절이 어디 갑니까?"



아이의 말이 
교육과정이 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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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부모가, 어린이집에서 선생님이 마주이야기를 걸며 들어주려 하자 아이들 입에서는 봇물 터지듯 날마다 말이 터져 나왔다. 말만 들어줘도 아이의 모든 것, 아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한 것을 다 알 수 있어서 아이가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를 알고 도와줄 수 있었다고. 어른들이 가르쳐도 안 풀리던 문제들이 아이들 말로 하면 쉽게 풀린다. 그래서 아이들 말을 으뜸 자리에 놓고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억지로 가르쳐야 할 게 없다.
그래서 아람마주이야기어린이집은 교육과정도 다 마주이야기에서 나온다. 숫자가 나오면 숫자 이야기를, 명절에 외갓집에 다녀온 이야기가 나오면 지도를 보며 다녀온 지역과 나라 이야기를 나눈다. 음식이 나오면 무슨 재료가 들어가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서로 신나서 이야기한다. 한 아이가 똥을 싸고 혼자 닦았다고 마주이야기에 쓰면, 너도나도 똥 닦기를 해보려 한다. 
또래들끼리 할 얘기는 얼마나 더 알아듣기 쉽고 재미있을까. 그래서 이곳 어린이집에는 한 반 아이들이 한 말을 다 모은 <더 들어볼거리>라는 마주이야기 주간 노트를 만들어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한다. 선생님이 받아 적은 아이들 말 속에 그 또래들이 알아야 할 것들이 다 있다. 공책은 금방 마주이야기로 가득 차 새로 마련해야 하는데, 차례대로 표지에 얼굴이 실린다. 아이들은 자신의 얼굴이 표지에 나오면 부모에게 보여주고 싶어 공책을 재빨리 가방에 챙겨 넣는다. 
원장실 안 책장에는 졸업생 아이들의 마주이야기 문집이 가득하다. 아이들 말은 하나도 버릴 수 없어 졸업생들 마주이야기 문집을 모아 놓은 게 어느덧 창고에 한가득이란다. 졸업 후에도 힘든 순간이 생기면 어린이집에 찾아오는 아이들도 있다. 원하던 대학에 떨어진 뒤 졸업식 날 우울한 마음을 감출 길 없어 어린이집을 찾아온 졸업생과 이런 마주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단다.
“처음 가고 싶던 대학에 붙은 아이들이 많니,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많니? 너는 더 많은 아이들과 공감하며, 이해하며 살아갈 능력이 생긴 거야. 잘했어.”
부모들은 묻는다. “어린이집에서는 마주이야기를 해도 초등학교 가면 안 하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요?” 그럴 때마다 답은 하나다. “즐거웠던 어린 시절이 어디 갑니까?” 마주이야기하며 자란 아이들은 살면서 힘든 순간이 생기면 들춰볼 것이다. 즐거웠던 어린 시절, 하고 싶은 대로 했던 말들이 고스란히 담긴 마주이야기 문집을. 그리고 생기발랄하고 말대꾸하던 힘을 재장착한 채 힘차게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게 바로 삶을 변화시키는 마주이야기의 힘이다. 그는 오늘도 불러주는 곳이면 전국 어디든 마주이야기 강의를 하러 다닌다. 한마디 한마디 금쪽같은 아이들 말을 있는 그대로 들어줄 때 일어나는 기적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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