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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라스틱 베이커리 Jul 19. 2021

넘어질듯 말듯

그렇게 프로가 되어간다.

아버지는 엄하셨다. 젓가락질을 맞으며 콩 한그릇을 옮기는 것으로 연습할 정도로. 말로만 듣던, 맞으면서 젓가락질을 배우는 사람이 나였다. 그런 아버지에게 배우는 것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 중 가장 엄하셨던 것은 ‘스노우보드’였다.


‘적어도 하나는 누구보다 잘해야 너의 나중 인생에서 도움이 된다’라는 말씀을 시작으로, 초등학교 5학년부터 약 3년간, 매 스키 시즌마다 나는 ‘훈련’을 주말마다 다녀왔다. 새벽 4시에 기상하여 오전 라이딩, 간단한 점심 후 오후, 저녁, 심야 라이딩까지. 8–12라는 지옥 훈련이 끝나면 바로 취침. 그리고 새벽 4시에 똑같이 일어나 새벽 스키부터 시작, 5시 전까지 진행되는 아주 고강도 훈련이었다.


심지어 라이딩에 대한 피드백은 리프트를 올라갈 때 마다 진행되었다. 아래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각각의 장점과 단점, 이번에 나의 코너링이 어디가 어땠는지, 엣지가 왜 덜 박혔는지,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더 좋은 라이딩을 할 수 있는지, 등등.


당시 정말 힘들었다. 딱 하루만 안가고싶다고 했지만, 머리를 맞으며 울면서 스노우보드를 탔을 정도니까..


-


스노우보드를 타면서 카빙턴을 타게되는 결정적 계기가 있는데. “고속 라이딩에서 넘어지기 직전”이다.


엣지는 말 그대로 정말 얇은 칼날이다. 그 위에 나의 몸을 실어 달린다는 것은 말 그대로 위태로운 상태인 것인데, 심지어 적당한 속도까지 있어야 한다. 여기서 회전/진행하는 방향으로 몸이 완전히 넘어가기 직전에 다리로 가압(보드를 눌러)한다. 그러면 보드가 살짝 휘면서 라이더는 칼로 눈을 그은 듯한 얇고 넓은 호를 그리며 턴을 하게 되고, 그것이 흔히 상급 기술이라 불리는 카빙턴이 된다.


이를 채득하기 위해 나는 수도 없이 달리며 넘어졌다. 속도와 무게 중심, 둘 간의 황금 비율을 찾는 것은 수십 수백번 넘어지고 한 번의 카빙을 수십번 반복했을 때였다. 비로소 1번의 카빙턴이 완성되었을 때, 불과 몇번 지나지 않아 2번, 3번 연속된 카빙턴을 할 수 있었고, 그 이후는 그저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 되었다.


묘하지 않는가. 빠른 속도로 달리며 넘어지는 것이 고급 기술의 핵심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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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상급 프로 디자이너”라는 고급 성취를 위해 열심히 달려가는 라이더와 같다.

특히 디자이너는 직업상 많은 것을 고려하면서 최상의 결과물을 기획할 수 있어야한다. 비즈니스와 오너에 따라 달라지는 수많은 프로젝트들에게서 숨겨진 니즈를 파악하고 이를 성공시키기 위한 적정선: 시각적 완성도와 제작/양산 용이성, 오너의 취향과 트렌드, 등등. 외부에서 바라볼 때 아무것도 아닌 것들은 사실 내가 직접 타보면 너무도 위태로운 한 끝 차이인 것들이 많다. (책임감을 가지고, 결과를 알 수 없는 일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번 프로젝트는 무엇을 성공이라 부를 수 있을까?

성공을 위해선 어떤 요소들이 부딛히고 있는가?

둘 사이에 우위를 어떻게 정하고, 혹은 어떻게 조화롭게 융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구현할 수 있을까?

이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클라이언트, 대중, 타겟 소비자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수많은 복잡한 요소(Wicked problems)들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 디자이너의 숙명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디자이너(제품)의 전성기는 30대 중후반에 오는 것이 아닐까? 실질적인 경험을 통해 배울 수 밖에 없는 것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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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 불안하고 아직은 프로가 될 수 없음은 분명 경험이 부족해서이다.

안전하단 이유로 낙엽만 타고 있으면 카빙턴에서만 느낄 수 있는 짜릿한 보드의 진면목을 느낄 수 없다.

그저 눈 위를 내려오는 재미만 있을 뿐.


적어도 나는 ‘스노우보딩’을 한다면, 그의 진면목을 느끼고 싶다.

동시에, 디자이너로 “선택”하여 들어선 만큼, 진정한 디자인의 진면목을 느끼고 싶다.


함께 성공을 도모하는 프로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달리고 넘어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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