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빛 Nov 30. 2021

개성 가는 길

최은영의 '밝은 밤', 그리고 개성

 최은영의 ‘밝은 밤’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개성까지 세 시간을 기차로 가야 하는 삼천이라는 곳의 백정 딸로 태어난 증조할머니와 그 후손인 여성들의 백 년의 연대기이다. 그 시절 백정 신분에 대한 천대가 가득한 상황에 종교적인 이상만으로 정신대로 끌려갈 뻔 한 사람을 구해내고자 그녀를 데리고 개성으로 나갔던 증조할아버지가 살고 있던 곳은 개성에서 서북쪽으로 100여 km 떨어진 황해도 내에 위치한 삼천군이었다.

 첫 장면이 그와 그녀의 만남과 개성으로의 가출인데, 기차를 타고 세 시간을 갔다고 하는데, 어떻게 갔을까? 카카오 맵에서 철로를 찾아보니, 삼천에서 평양 쪽으로 사리원까지 가서 다시 개성으로 내려오는 철로가 그려져 있다. 아, 이 길을 따라 굽이굽이 가다 보면 세 시간도 더 걸리겠구나. 북한에서는 아직도 도로보다는 철로의 이용률이 높다고 하는 소식을 접했는데, 여기저기 이어져있는 철로를 보고 살포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 철로를 따라 개성으로 눈이 갔다. 어딘가 역이 있겠거니 하며 찾는데, 그 아래쪽에 ‘개성공업지구 폐쇄’ 이렇게 적혀있는 것을 보았다.

 아래로는 도라산 역과 위로는 개성 특별시 사이에 위치해 있는 공업지구는 거리를 재보니 8km만 지나면 도라산도 가고 개성시내도 가는 위치였다. 도라산 역에서 개성공업지구까지는 철로와 함께 도로도 이어져 있었다. 출입심사․통관․검역을 위한 CIQ에 주욱 대기해 있던 사람들과 저 도로를 통해 지나가던 차량들의 모습이 환영처럼 머릿속을 지나갔다. 저 길이 열릴 때의 환성이 들리다가도 막히고 난 후 개성공단 종합지원센터 건물이 폭파되는 폭음이 들려오는 듯했다.

 개성공단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다 보니 개성공업지구 지원재단이라는 곳에서 홍보영상을 접하게 되었다. 남측 관리자를 지낸 지리학을 전공한 강사의 개성공단 소개는 흥미로웠다.

 내가 관심 기울이지 못했던 부분들이 영상에서 흘러나왔다. 앞으로 우리의 미래를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많은 내용들이 있었다.

 개성공단은 2005년부터 기업들이 입주해서 인근의 주민들이 근로자로 참가했다. 5만 명에 이르는 이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남한에서 가져간 버스 300대가 운행되어 그 지역들을 오고 갔다. 아침나절 승객을 가득 태운 파란색 서울 간선버스들이 이곳이 어딘지 헷갈리게 만든다. 또 하나는 탁아소의 아이들과 엄마들을 만나게 해 주기 위해 개성공업지구 애기어머니차로 운행되는 노란색 버스가 보였다. 매일매일 공단과 집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는 수단이었다. 새삼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북한에서는 공동육아가 성하다고 들었는데 눈으로 직접 보는 광경에서 남한 사회와의 차이가 절실히 느껴졌다.

 영상 강의를 통해 만난 개성공단 사람들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우리네 모습과 비슷한 듯하면서 다른 모습들이 그랬다. 초코파이를 야근수당 대신 달라고 한다든지, 소시지 하나라도 자신이 선호하는 것으로 바꿔달라고 하는 모습은 자신의 이익에 민감한 우리와 비슷했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가득 채워주며 맡은 일에 열심인 모습이나, 화분을 깨고서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은 우리와 조금은 다르게 보였다. 그런 영상을 통해 그들 또한 삶에 최선으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공장별로 점심에는 영양분이 적은 도시락을 싸오는 북측 노동자들을 위해 커다란 국그릇에 그날의 단 하나뿐인 식단을 제공한다. 닭 고깃국, 돼지 고깃국, 소고깃국, 만둣국이 그날의 식단으로 제공됨으로 그들의 자존심을 살려주면서 함께 나아가기 위한 노력이 보였다.

 북측 노동자가 화분을 깨고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내놓은 이가 잘못했다고 강변하는 상황에서 영상 강의 강사로 나선 남측 관리자는 그 자리에서 화를 내지 않고 속앓이를 했지만 이후에 조용히 둘이 만나는 자리에서 “아까는 미안했습네다.”라고 사과한 북측 노동자 이야기를 했다.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자존심 때문인지 헷갈리지만, 그들과의 소통에 틈을 조금씩 주어야 한다는 예시는 공감이 많이 되는 설명이었다.

 분단 서독의 총리를 지냈던 빌리 브란트가 1989년 10월 우리나라에 와서 했던 말이 있다. “독일이 통일되려면 10년은 걸려야 할 겁니다.” 그런데 한 달도 되지 않아 독일이 통일되는 상황을 말하며 역사는 언제 어떻게 흘러갈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로 인해 급변하는 상황은 이후 통일 독일에게 많은 어려움을 만들어 내었다. 우리도 통일비용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이들이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통일비용이 많이 든다고 생각하지만, 분단에 따른 분단비용이 너무나 많이 든다는 것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 월세로 버리는 것과 같은 분단 비용을 들이는 것보다 내 집을 사고 투자하는 것과 같은 통일비용을 들이는 것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는 혜택이 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 간의 교통이며 통합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면 어떻게 될까? 말도 통하고, 얼굴도 비슷한데 떨어져 지낸 세월은 벽이 되어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연출할 것임이 뻔하다.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모습은 이용하고 반동적이며 강변하는 상황은 머릿속에서 받아들이지 못해 큰 두통이 일어날 것이다. 어떻게 그 상황들을 헤쳐 나갈까?

 개성공단이 그 사이에 한 일들이 이러한 어려움들을 해소해 간 여정이었다. 세월의 벽에 놓여 있던 사람들을 만나게 하고, 부딪히고, 깨지고, 배려해주고, 이해해주는 그 사이의 과정들을 남모르게 진행해 온 모습이 역력하다. 시간이 지난다고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개성공단에서도 잘하는 곳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잘못하는 곳도 있었다. 하지만 잘못을 지적하고 나무라기보다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들 사회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는 방법만이 서로 화합하는 길일 것이다. 그들의 감수성을 이해함에 대해 얼마나 준비되었느냐에 따라 북한 사람들의 대응도 달라질 것이다.

 개성공단은 우리에게는 통일의 거울이다. 단 하나의 관점만으로도 통일의 중요성을 인지할 수 있다. 남한은 지금 섬이다. 반도가 아니라 섬으로써의 기능만 할 뿐이다. 우리는 해외로 갈 수밖에 없다. 땅을 밟고 외국을 못 나가는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통일이다. 자원이나 저렴한 노동력이 문제가 아니다. 연결성과 입지를 충분히 누릴 필요가 있다. 섬에서 반도가 되었을 때 우리 위치는 중국, 러시아, 유럽 대륙에서 일본, 아시아로 진출하는 기착점으로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초역세권이라는 하는 강사의 표현이 너무나도 와닿는다. 물류와 문화, 인적교류가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돌아가는 길보다 빠른 길목에 우리는 위치하게 된다. 우리가 누릴 것들이 더 많아진다. 빼앗는 것이 아니다. 열린 공간에서 입지와 변화된 상황에서 우리가 누리게 되는 것이 생기는 것이다.

 남북통일은 오는가? 결국은 온다. 확언을 하는 강사의 말은 다른 느낌이었다. 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럼 언제 오는가? 우리 예측을 뛰어넘어서 다가올 수 있다. 갑작스럽게. 이것이 그의 답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소통하고 서로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개성공단이 해왔던 일이다. 그가 13년 동안 개성에서 일어난 여러 일들과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제시하는 것이 이것이다.

 사람들이 생각이 다르면 정말 같이 살기 힘들다. 그래서 서로 이해해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매개가 되는 경제적인 부분들이 우리 삶을 바꾸는 힘은 먹고살아야 한다는 인간이라는 한계에 기인하겠지만, 그 힘이 정말 대단하다.

 그가 예시를 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와 별로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악마는 디테일 속에 있다고 했던가. 조그마한 생각의 차이는 오해를 불러올 것이다. 지금 우리들의 상황이 그런 것 같다. 그래서 더 이해가 필요하고 민감한 감수성의 차이를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소설 속의 증조할머니는 전쟁통에 남편과 아이의 손을 잡고 대구로 피난을 내려왔다가 북녘 땅이 가까운 바닷가 ‘희령’에 자리 잡는다. 아마도 금강산이 가까운 지역이었을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면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도록 가까이에 자리 잡은 것일까?

 나도 금강산에 가 본 적이 있다. 2003년 육로가 열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항구의 배에서 숙박을 했었는데, 여정의 마지막 밤이었다. 그다음 날 해수욕장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해수욕장을 보고 싶어, 컨테이너 박스들이 숙소와 상점으로 운영되던 지역 바로 옆, 모래사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어두운 해변가에서 ‘손 들라우’하는 위협 소리가 들렸다. 바로 손을 들었는데, 앞에는 햇볕에 까맣게 그을린 조그마한 두 명의 병사가 총으로 나를 겨누고 있었다. 공연장과 온천이 있던 지역에서도 여러 북한 사람들과 만났었는데, 유난히 왜소해 보이는 병사들은 이전에 만난 북한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처럼 느껴졌었다. 너무나도 먼 곳에 있는 사람들 같았다.

 그 몇 년 후 새벽에 그 모래사장을 넘던 남측 관광객이 총에 맞아 사망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내가 봤던 모습은 겉으로만 보이는 그들이 보여주고 싶은 모습과 총을 든 모습이었지만, 개성에서 만난 남측과 북측의 사람들은 달랐을 것이다. 살아가고 있는 모습들을 서로 바라보며, 오해를 쌓기도 하고 풀기도 하며 지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같이 해야 하는 자리였을 테니 말이다.

 2016년의 파국 이후 아직도 절절히 관문이 열리기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다시 열리면, 1단계에서 사용한 100만 평이 아니라 2단계에서 250만 평, 3단계에서는 2천만 평이 모두 개발되어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서로를 잘 이해해가는 과정을 다시 활짝 열어젖히기를 바란다. 개성으로 가는 길이 다시 열려 통일의 새 희망이 도래하는 날을 기대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그 일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희령’의 그 북녘을 바라보는 사람들처럼 많은 이들이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최은영 '밝은밤'을 읽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