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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Nov 09. 2023

아무튼 출근

평범한 일터의 '비범함'에 대하여



내가 좋아하고, 그래서 즐겨 읽는 중에 <아무튼 oo>이라는 에세이 시리즈가 있다. 200 페이지가 채  못 되는, 손바닥 만한 크기의 에세이 시리즈들이다.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라는 주제로 저자들은 자신들이 가장 애정하는 것을 솔직 담백하게 풀어낸다.  그중에 내가 재미있게 읽어 본 것은 <아무튼 떡볶이>, <아무튼 언니>, <아무튼 망원동>이다. 한 출판사가 모든 책을 펴내는 것이 아니라 '코난북스', '위고',  '제철소' 등등 대체로 작은 규모의 출판사들이 돌아가며 책을 내놓는다. <아무튼 잡지> <아무튼 뜨개> <아무튼 메모>, <아무튼 연필>도 읽어 보고 싶다. 비록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지는 않을지라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말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들이 아닐 수 없다.



여러분에게 '생각만 해도 좋은 것들'이란?

비록 모두가 좋아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인 이 '아무튼 시리즈'에 (기회가 된다면) 내가 보태고 싶은 게 몇 가지 더 있다.  <아무튼 낭독>, <아무튼 글쓰기>, <아무튼 산책>, <아무튼 공원>, 그리고 <아무튼 출근>이 바로 그것이다. 아니 책을 쓰지 않더라도 각자 종이와 연필을 꺼내 '생각만 해도 좋은 것들'을 적어 보는 것만으로도 무척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가. 어쩌면 그 목록이 길수록 우리 일상에는 활력과 의욕이 넘칠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영하 작가는 어느 팟 캐스트에 출연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이가 들면서 우린 점점 몰입할 대상을 잃어버리고,

밤새워 할 수 있는, 좋아하는 것들이 없어지면서 삶이 무료하다고 느낍니다."

그렇다. 가시적인 대가와 물질적 보상은 없을지라도,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쓰잘 데' 없어 보이는 것들에

빠져들고 애정하던 '덕후의 시절'이 지나고 실리와 기회비용만을 따지며 우리는 어른이 된다.

그리하여 한때 차고 넘치던 '생각만 해도 좋은 것들'을 우리는 하나 둘 잃어버리고 만다.




지난 10여 년 간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아무튼 '출근한다는 것'이 내겐 '생각만 해도 좋은 것'이었다. 아니 '생각만 해도 좋은 것'까지는 아니어도 예사롭지 않은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나에게만 그럴까?

보통 직장인이라면 일 년 365일 중 적어도 200일 이상은 자의든 '타의'든 출근해야 한다. 매일매일 출근해야 하는 정규직 임금 노동자이든, 그때그때 출퇴근하는 이른바 비정규직 '기간제 노동자'이든. 수많은 직장인들을 짧게는 2~3년간, 길게는 20년, 30년씩, 때론 간판을 바꿔가며, 때론 같은 일터로 흡인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각자의 이유가 어떻든 자세히 들여다보면, 출근이라는 현상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극히 성가시고 단조롭고 부자연스러운 출근을 기필코 오늘도 하고 마는 원동력은 도대체 무엇일까? 단지 연봉이나 급여, 월급이나 봉급으로 불리는 경제적 보상 때문만일까?


출근의 본질이야 물론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나 전문인의 사명감일 수도 있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동력 제공일 것이다. 다소 거창한 그런 의미부여와는 상관없이 관성처럼, 습관처럼 우리 몸에 각인된 기억 때문에 우리는 졸린 눈을 비비며 '위험한' 이불밖으로 나서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직장이라 불리는 그 '위험한 이불밖'은 평온이나 안정과는 거리가 먼 낯선 타자들의 부산한 욕망이 이글거리는 불안의 '지옥'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밥벌이의 지겨움'이란 표현도 생겨났고, '월요병'은 직장인들의 만성질환이 아니던가. 또 "직장인의 단점은 출근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고, 프리랜서의 단점은 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라는 말도 있다. 이유여하는 제각각이지만 오늘도 많은 직장인들은 각자의 일터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때론 웃고, 때론 상처받는다. 물론 상처가 없으면 '경험'도 없고 '사건'도 없다.





인간이란 존재는 상처와 결핍 속에서도 기어이 행복을 찾아내는, 지구상의 거의 유일무이한 동물이 아닐까 싶다.  코로나 전염병으로 재택근무가 확대되고 각종 비대면 활동이 급증하던, 이른바 '언택트(untact)의 시대'에도 우리는 무엇보다 직접적인 '대면'과 '접촉'을 갈망하지 않았던가. 많은 직장인들에게 출근이란 바로 그런 대면 접촉의 시발점이다. 만성적 고용불안의 시대에 출근할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 안도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2023년 현재 전체 임금노동자의 35%~46%에 달하는 비정규직 노동의 일상화는 나아가 '규칙적인 출근'을 부러움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가, 인터넷에는 직장인 브이로그(V-log)가 넘쳐난다. 어떤 대사나 설명도 없는 여느 직장인의 출퇴근 모습이나 근무하는 일상을 담은 영상을 그저 지켜보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심지어 <아무튼 출근>이라는 공중파 방송 프로그램도 생겨났다. 이 예능 프로그램의 본질 역시 '직장인 브이로그' 형식을 이용해 요즘 직장인들의 다양한 밥벌이와 그들의 직장 생활을 엿보는 것이다.


출근길의 풍경이 말해주는 것


이불킥을 하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문턱을 넘어 일터로 향하는 많은 직장인들의 출근길은 얼핏 보면 그저 단조롭기 그지없어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면 모두 똑같아 보이는 수많은 직장인들의  출근길에도 다채로운 사건과 우역곡절을 만날 수 있다. 비산하는 소음과 경련성 경적 속에서도 묵묵히 스마트폰에 시선과 청각을 빼앗긴 직장인들의 모두 동일하지만 저마다 다른 출근길에는 계절의 변화가 있고, 경이로운 서사가 있고, 오래 여운을 남기는 체취와 온기가 있다.   

그 출근길이라는 경이로운 통과의례를 지나 도착한 일터에서도 우리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부딪힌다. 그중엔 자신과 결이 맞는 사람들도 있고, '저 인간은 대체 왜 저러나' 싶은 사람들도 있다.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처럼 해야 하는 일도 다양하다. 때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열정과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지만, 때론 습관적으로 무의식의 세계에 빠진 채 처리하고 마는 루틴화된 업무들도 많다. 어디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 무엇을 하든, 어떤 기후변화에도 어김없이 반복해야 하는, 이 출근한다는 일의 '비범함'을 지난 10여 년간 나 역시 체험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시간 속에서 내가 겪은 '사건'과 '고통', '경이'와 '매혹'의 순간들을 이제 여기에 기록하려 한다. 그 길에서 만난 다채로운 출근길의 풍경과 다양한 의미에서 '비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무튼 출근'은 계속된다

요즘 상상을 초월하는 부동산 가격 폭등이 평범한 직장인들을 한순간 '벼락 거지' 신세로 전락시키고, 코인 광풍과 테마주 대박이 탄생시킨 성공한 '파이어족'(fire족)의 미담들이 부지런한 노동의 의욕을 일순간 꺾어버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의 탄생 이래 평범한 직장인들의 '아무튼 출근'은 단지 '지겨운 밥벌이'의 차원을 넘어 여전히 계속될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런 시대일수록 성실한 노동과 평범한 일터의 의미를 지키려는 '아무튼 출근'은 더더욱 예사롭지 않은 일임에 틀림없다. 


이 '출근한다는 일'의 비범함과 예사롭지 않음을 기록하는 시점이 내가 이곳을 떠나기로 결심한 이후라는 점은 다소 아이러니하면서도 의미심장하다. 그래서 이 글은 '그날'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한때 내 '생각만 해도 좋은 것'이었던 '아무튼 출근'이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무의미가 되었음을 자각한 날, 아주 오래 지속된 무기력 속에서 완전히 소진되었음을 나 스스로 환자이자 의사로서 진단한 날, 한 때 내가 몸담았고 애정했던 조직의 몰락이 시작되었음을 서늘하게 예감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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