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살이궁리소
물경 15년을 고민하고 준비해 왔는데 결정은 15분 만에 하다시피 했습니다. 제 인생은 왜 이리 전환점마다 전광석화처럼 다가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살면서 두 번의 큰 결정적 순간이 그런 식으로 결정되었는데 이번에도 운명처럼 다가오네요.
딱 보고 15분 만에 전광석화처럼 결정했습니다. 장소는 충남 아산입니다. 그러고 보면 '아산'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은 우연인지 인연인지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15년 전 아산과 깊은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저는 충청남도 지역농업클러스터 추진단장을 하며 아산시에 총 사업비 100억 규모의 '아산시 자원 순환형 지역농업 클러스터'를 추진한 적이 있습니다. 충남 16개 시군 중 아산으로 결정한 것은 오랜 세월 헌신적으로 지역농업을 주창해 온 한살림 생산자 중심의 산신령 같은 활동가 그룹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도청의 입장은 그분들(활동가)과 함께 하는 것을 우려하며 반대하는 기색이 역력했었습니다.
센 사람들이라서 수틀리면 사업 중에 걷어 차고 나갈 것
저는 도청 관계자들에게 그분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양측 20여 명 있는 자리에서 한 마디 했습니다. "나도 수 틀리면 엎어 버리는 사람이다. 서로 판이 깨지지 않도록 잘해보자" 이렇게 시작되어 현재 전국의 대표적인 한살림 생산자 조직인 푸른들 영농조합이 아산시 음봉면에 자리를 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저는 의외의 현실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이후의 삶. 그리고 오늘 이 상황에 이르게 되는데 장소가 당시의 그곳 ASAN이니 참으로 운명 같습니다.
당시 그분들이 오랜 세월 지역농업을 주창하며 농민운동을 해왔지만 아쉽고 부끄러워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녀 중에 단 한 명도 농고, 농대 진학을 한 경우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듬해에 자녀 중 한 명이 우리 대학(농대)을 진학하게 되었는데 모두들 나서서 등록금을 마련해 주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농촌의 심각한 후계인력 단절
그것은 저에게 농촌이 더 이상 자체적인 후계인력의 재생산이 불가능하게 된 것을 실감 나게 느끼게 해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저는 이듬해 직장을 옮기게 됩니다. 지금은 연암대학의 교수로 되어 있지만, 당시에 귀농지원센터를 만들어 주는 조건으로 대학의 산학협력단 2년 계약직 직원으로 급여까지 낮춰가며 직장을 옮겼습니다.
약속대로 대학에서는 귀농지원센터를 설립해 주었습니다. 부임한 첫날 (2006년 3월 2일) 시작한 것이 농림부 최초의 국비지원 귀농교육이었고, 현재는 제가 센터장에서 물러나 있지만 4년 전 2016년에 1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이후로 MBC 귀농 아카데미 원장이라든지 2009년에 연암대 원예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영농창업과정'을 운영하는 등 나름되게 신규인력 양성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농촌에 다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10여 개 지자체와 업무 협약을 맺는 등 지자체와의 협력에 중심을 두었습니다. 왜냐하면 도시민의 성공적인 농촌정착은 정부 지원보다도 지역민과 행정이 합심하고 합력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10여 년을 해 오다 든 생각은
더 많은 생산보다 더 좋은 소비와, 납세자의 농촌유지 비용 지불 공감
요컨대 납세자들이 농업이라는 산업, 농촌이라는 공간 그리고 그것을 지탱하는 농민이라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농민이 살아야 국민이 살고, 농촌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저는 농촌과 도시가 서로 포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시와 농촌은 어느 한쪽이 일방적인 도움을 주거나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서로 상생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러자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 너 알기'가 우선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도와 농촌이 서로의 가치를 공감하는 가칭 '도농 공감소'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한 첫발을 내딛습니다.
아직은 단체도 법인도 아니고 농가주택에서의 사랑방 수준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앞으로의 도농 공감소는 2:8 방식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20% (농민 대상) : 생산자들이 안전 먹거리 생산과 깨끗한 농촌환경 유지라는 상호준수(cross-compliance) 의무를 인식하자는 것입니다.
#80% (납세자 대상) : 미래세대인 아이들에게 농업농촌의 가치를 알리고, 현재 세대인 납세자들에게는 공정한 가치 지불에 대한 인식 확산을 통해 생산자들의 공정한 생산과 농촌의 공익적 기능 유지 활동이 지속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지난 6월에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 '최우수상'을 수상했던 mbc 다큐 '농업이 미래다'의 농업교육 편은 저의 이러한 생각을 고스란히 반영하여 기획에서 국내외 출연까지 수개월 간 참여했던 부분입니다. 시간 내셔서 한 번 봐주시기 바랍니다.
먹거리라는 것은 내 생명을 지키기 위해 네 생명을 받는 숭고한 것
한편 저도 어느덧 50대 후반에 들어섰기에 더 늦어지면 시작을 못할 것 같습니다. 따로 사는 아이들은 우려하지만, 같이 사는 아내가 등을 두드려 주는 것이 그나마 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저의 이런 생각에 많은 분들의 우려와 기대가 교차해 왔습니다. 나름 편하고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입장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그것이 편하지 않으니 어쩌겠습니까...

물론 저는 학생들이 참말로 좋습니다. 천직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대학에서 농업인력을 양성하는 농대 교수의 일은 당분간 계속할 생각입니다. 솔직히 입에 풀칠하는 측면도 있구요....
실제로 현실은 가까스로 일부 토지 계약은 했지만, 가나안 농군학교를 세울 당시보다도 더 가난한 상태라서 '도농 공감소'를 언제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을지..........

웃자고 하는 소리지만, 귀농 열풍에 부채질해 농지 가격을 올린 저의 자업자득이기도 하지요.
게다가 저는 현재 살고 있는 지역이 농촌지역이라 귀농창업자금 지원 대상자에도 포함되지 못합니다. 농식품부의 인력위원장으로 귀농 창업지원 자금 정책 만들 때 농업학교 세우는 것도 대상에 넣을 걸 그랬습니다. ㅎㅎㅎ
시민들과 농사지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세간살이를 아무리 줄여도 창고에 쌓아야 할 정도로 집은 작지만 잔디밭 마당은 300평이나 되니 주말이나 저녁에는 잔디밭 마당에서 농업계와 소비자 분들이 만나는 소비자와 농촌의 가치 공감 토크도 열어 볼 생각입니다. 저는 그냥 그런 것이 좋은 것을 어떡하겠습니까.
주변에서 많은 분들이 도와주고 계십니다. 마을에 살고 계신 지인은 토지 매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셨고, 인근에 농사를 하고 있는 지인은 와서 토질을 봐주겠다고 하고, 조경을 하는 지인은 조경을, 그리고 또 한 분의 지인은 토목을 봐준다고 나서고 계시고, 졸업 후 영농을 하는 제자들은 여러 가지로 나서서 돕고 있으니 제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2006년 3월에 뜻을 세우고 주변에 밝힌 지 15년이 지났습니다. 그 당시부터 저의 메일 ID가 ka50인 것은 50대 중에 '시작'을 하자는 것이었는데, 잘 만하면 스스로의 약속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1리터의 곡물 생산도 중요하지만 1 평방미터의 농촌 공간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가치
배를 채우는 농업과 더불어 가슴을 채우는 농촌공간을 유지하는 것의 소중함.
농촌이 살아야 나라가 살고, 농민이 살아야 국민이 산다.
마을은 송악저수지와 숲 길이 교차로 보이는 산책로가 이어지는 곳이기도 하므로 숲 길을 걸으며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결정 요인 중의 큰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아산시 식수원인 집수면적 4,333㏊의 송악저수지 인근으로 반딧불이까지도 나오는 청정지역입니다.
지금도 훌륭하지만 지역이나 마을 사람들과 합심하면 숲길을 걷다 간간히 저수지가 보이는 좋은 공간이 될 것 같습니다. 더구나 자동차가 다닐 정도로 길이 넓고 가파르지 않아 비포장 도로면만 정비한다면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기에는 최적입니다. 온, 오프라인을 통해 납세자들이 농촌의 공익적 기능을 온몸으로 느끼게 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농촌의 자연경관은 무대이고
그곳에 사는 동식물은 배우입니다.
농촌을 찾는 도시민은 관객이고,
저는 연출가가 되어 볼 생각입니다.
여러분들은 지혜의 대본을 내주세요.
저의 꿈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