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시안이 난무하는 "로스트 보이스 가이" 북디자인 이야기
책덕 출판사에는 예전부터 책표지 디자인 과정을 기록하는 전통(?)이 있다. 첫 책 미란다처럼의 시안 발전 기록을 공개했을 때는 디자인 하는 분이 감탄의 댓글을 달아주셨다. 어떻게 이렇게 용기있냐고...(그분은 좋은 뜻으로 한 말이지만ㅎㅎ) 그때는 디자인의 '디'자도 모르고 마구잡이로 만들 때라 나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엉망진창 시안을 다 올렸었다.
그동안은 내가 디자이너라는 정체성이 한 1% 정도였기 때문에 디자인 과정을 드러내는 일이 별로 꺼려지지 않았다. 이번 표지도 마찬가지다. 그냥 나는 사람들과 함께 책을 만들고 저자의 글을 읽으며 느낀 것, 그리고 책덕만의 개성과 의도를 이케저케 잘 섞어서 하나의 포스터 같은 이미지로 만들고 싶었고 그 과정을 나누고 싶다.
처음에 컨셉을 잡을 때 생각한 건
.영국의 인디, 브릿팝, 워킹클래스 느낌(그게 뭔데...) 약간 빈티지하면서도 팝!한 컬러, 컨버스화 바랜 청색, 영국 국기랑 뭐 그런 거...
.인디 영화 포스터 같았으면 좋겠다. 저자가 스탠드업 코미디언이기도 하니까 뭔가 무대에 서 있고 연극이나 인디영화 같은 공연 포스터 같으면 활용하기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해서 몇 가지 이미지를 찾아서 스크랩해 두었다. 보통은 핀터레스트에 보드를 만드는 데 이때는 그냥 검색해서 저장해두었다. 리 리들리의 유머랄까 말하는 스타일이 영국 펑크 감성과도 느낌이 비슷해서 그린데이의 앨범 자켓도 찾아보고 내가 좋아하는 어웨이위고 영화 포스터도 찾아보고.
.번역가팀에서 대부분 리 리들리의 사진이 들어갔으면 해서 리 리들리의 모습과 일러스트를 어우러지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리 리들리 사진을 찍은 작가에게 메일을 보내서 직접 허락을 구했다.)
.키 컬러는 사이언C 100%로 선명하고 경쾌한 파란색으로 잡았다. 뭔가 리 리들리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느낌. 파란색 티를 자주 입어서 그런가? 그리고 감정에 호소하는 느낌과 거리를 두고 싶었고 유쾌한 이미지는 살리고 싶어서 이 파란색을 택한 것 같다. 특히 내지에 2도로 이 색을 쓴 건 정말 마음에 든다. 처음 써본 프런티어 터프라는 종이가 원색을 표현하는 느낌이 엄청 좋았다.
파란색으로 색은 정하고 전체적인 느낌을 대충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아직 타블렛 사기 전이라 마우스로 느낌만 잡아봄.)
아무래도 배경으로 쓸 일러스트의 감도를 높이려면 펜 타블렛으로 그려야 좋을 듯했다. 표지 이미지를 위해 거금을 들여 와콤 타블렛을 샀다. 40만원대 돈을 쓰려니 후덜덜 했지만, 천년만년 써야지.
처음에 잡은 이 구도가 거의 최종 표지까지 이어졌다. 스케치 느낌이 나쁘진 않은데 뭔가 강렬함이랄까 포인트가 확실하지 않아서 몇 번을 다시 그리고 브러시 굵기를 조정했다.
일러스트는 책에 나오는 리 리들리와 관련된 소품과 리 리들리가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 풍경,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스태드업 코미디 공연장 거리 등을 자연스럽게 배치해봤다. 그리고 리 리들리가 둥그런 단상 위에 올라가 있었는데, 파란색으로 그려서 그런가 무슨 얼음 빙벽 같기도 하고 좀 묘했다. 뭐냐고 물으면 그냥 리 리들리만의 무대다, 라고 설명했지만 뭔가 찝찝한...
결국 무대를 삭제하고 제목 타이포만 아래에 깔기로 했다. 이때 선택한 폰트는 바로 '창원단감아삭체'인데, 신의 한 수처럼 다가왔다. '로스트 보이스 가이'라는 타이포를 쓴 균형감이랄까 입체감이 좋았달까. 그래서 무대를 치운 자리를 잘 메워주었다.리 리들리는 몸 왼쪽이 전체적으로 약해서 똑바로 걷지 못 하는데 그걸 가지고도 장애 드립을 한다. 그래서 마지막에 제목 타이포를 살짝 기울여주었다. 세상도 기울어 있으니까!
마지막쯤에는 점자 제목 등 이런 저런 요소가 많아지면서 점점 산만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다시 다 빼고, 키컬러를 중심으로 내가 원하는 분위기가 나는 색조합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때 찾은 것이 바로 영화 "미드90"의 포스터다. 보는 순간 딱 이 색감이야! 영국 인디(?) 느낌이야!(라고 했지만 미국 영화임)라고 외치고 컬러를 따와서 적정한 비율로 배분해보았다.
일러스트에도 스크래치 그림(검은 크레파스로 덮고 이쑤시개로 긁는 그거)처럼 세 가지 색을 나눠서 깔아보았는데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하단에 점자 제목을 적느라 처음 만들었던 비율과 좀 달라졌지만 이 점자 제목의 존재감을 나는 꼭 드러내고 싶었다. 있는 듯 없는 듯 넣기는 싫었다. 내가 이 책표지를 통해 가장 의도적으로 전하고 싶은 것이었다. '다수만 쓰는 언어만이 표지에 들어간다'는 생각을 조금은 깨보고 싶었다. 우리에게는 편하게 읽히는 이 모든 한글 텍스트가 의미 없으며 점자로 세상을 읽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당연하지만 쉽게 망각하는 사실이 드러나기를.
그러니까 실은 이 점자 제목은 시각 장애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비 시각 장애인을 위한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점자 에폭시가 많이 도드라지지 않아서 뒤늦게 붙이는 설명이 아니다! 진짜로!)
이런 여러 가지 생각의 타래가 이어져"로스트 보이스 가이" 책표지는 이런 모습으로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다. 많이 사랑해 주시라~
뒤표지와 책등 책날개도 공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