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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리 Jan 09. 2024

영어와 당근

간재리가 영어회화를 잘하고 싶다고 하여 잠시 고민에 빠졌다. 회사에서 영어를 쓰는 동료들과 일하고 있기 때문에 답답함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내가 배운 것처럼 드라마로 공부하라고 몇 번 알려줬지만 완전히 맞지는 않는지 몇 번 하다가 그만두었다. 요즘에는 말해보카인지 하는 앱으로 퀴즈를 풀듯이 공부하고 있기는 한데 단순히 그것만 반복하는 것으로는 전체 문장이 자연스레 나오지 않는가 보다. 듀오링고도 마찬가지겠지.

회화든 독해든 토익이든 일단 아주 기본적인 문법이 튼튼해야 할 것 같아서 그래머인유즈 베이직으로 같이 공부해보려고 마음 먹었다. 당근에서 찾아보니 마침 새 책을 내놓은 사람이 있길래 오늘 아침 눈길을 헤치고 거래하러 다녀왔다. 

흩날리는 눈송이를 받아먹어 보려고 입을 크게 벌리고 뛰어가는 아이가 보였다. 내가 만든 비관적인 사고방식을 조금만 무시하면 언제든 즐거울 수 있다는 사실을 곧잘 까먹는다.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눈송이는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게 두둥실 휘청 하며 내리고 있었다. 커다란 눈송이를 목표로 하고 손바닥을 펼쳤다. 휙 휙 헛손질 몇 번 후에 눈송이를 손에 잡았지만 금세 녹아 버렸다. 

약속한 약국 앞에서 판매자를 기다리며 영상을 찍었다. 손가락으로 눈이 쌓인 난간을 휙휙 쓸어본다. 이걸로 영화를 만드는거야. 이름하여 '세로 영화' 손가락이 주인공이고 눈 쌓인 세상이 배경이지. 혼자 각본, 연출을 오가며 상상을 하다 보니 판매자가 도착했다. "책..." 정도의 말 한마디에 만 원짜리 한 장과 책이 담긴 쇼핑백이 오고 가고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로 찰나 같은 당근 거래가 끝났다. 뒤돌아 서며 펼쳐본 그래머인유즈는 연필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다.

집에 오는 길에도 영화를 찍는다는 망상을 이어가며 씩씩하게 걷는다. 한손이 무거워졌지만 나의 창작 열정을 막을 수 없다. 이참에 아까 지나쳤던 커피숍에 들러 여유를 좀 부릴까. 잠깐 고민했지만 일단 책을 집에 가져다 두기로 한다. 

집에서 3천 보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정육점은 항상 목청높여 고기를 홍보하는 점원들이 있다. 2년 전 필라테스를 하러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지나가던 곳인데 오늘은 녹음한 목소리를 틀어놓았지만 여전히 활기가 넘친다. 앞으로는 고기를 살 때 여기로 와야 겠어. 아침마다 식재료를 사러 단골 가게에 들르는 것도 좋겠군. 하루에 5천 보는 걸어야 몸에도 마음에도 좋을테고. 택배도 적게 시킬 테니까. 야채랑 과일은 경성고 사거리에 있는 가게로 가고 계란이랑 두부는 두레 생협으로 가야겠다. 빵은 쿠리노키나 봉교나 훈고링고에서 사고. 버터, 잠봉, 루꼴라, 올리브오일, 발사믹 정도만 가끔 인터넷으로 사야지. 참 컬리에서 파는 당근채도 편리해서 포기할 수 없다. 바로 받아서 발사믹 식초와 레몬즙, 올리브오일을 대충 두른 다음 냉장고에 넣어두면 되니까. 

일과 공부와 식생활과 놀이... 잠깐의 애도. 오늘 오전은 이렇게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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