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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연이 Nov 10. 2021

굿바이 20대, 굿바이 피해의식

자기 연민도 안녕

억지로 붙잡고 있던   남은 20대의 나를 보내줄 시간. 뜨겁게 안녕하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아무것도 몰랐던 스무 살의 나를 떠올려 본다. 이제 어른이 되었다고 눈이 펑펑 내리던 겨울 주량도 모르는  소주와 맥주를 들이부어 기절해버렸던 , 나는 그렇게 20대의 포문을 열었다. 그리고 술과 사람과 사랑과 눈물과 환희로 점철된 10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풋풋하고 진득했던 나의 20. 아팠고 아름다웠던 나의 20.


20대 때의 나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피해의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피해의식과 자기 연민에 쩔어있었다. 스스로를 불쌍하다고 여기면서도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바라보는 시선을 견디지 못했다. 진짜 내 모습과 이상적인 내 모습 사이에 자격지심을 꽁꽁 숨겨두고는 들키면 화를 냈고, 알아주지 못하면 꽁하니 입을 닫았다. 내 피해의식은 아무도 없는 한 겨울 숲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의 모양이었다. 가까이하면 나를 태워버리고, 멀리하면 나를 얼어붙게 하는 그런 존재. 그걸 다루는 방법을 몰라서 여러 번 데였고 또 여러 번 동상에 걸렸다.


더 타오르기 위해 주변에 연소시킬 것을 찾는 허기진 불처럼 내 피해의식에도 허기진 결핍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결핍, 마음 한 구석에 채워지지 않는 그 헛헛함이, 나를 자주 못나게 하고 작아지게 했던 그 공허가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모른 채 방황하며 20대를 보냈다. 30대를 맞이하기 3개월을 앞둔 어느 가을이었다.


길을 걷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핑계를 앞세워 자신을 지키려다 파국에 치달은 이별을 한 뒤였다. 눈을 뜨고 있는 내내 심장이 따끔거렸다. 커다란 산불이 나 곳곳에 불똥이 튀는 것처럼 몸 이곳저곳이 뜨거웠다. 무엇이 나를 이토록 고통스럽게 만드는지 납득할 수가 없어서 더 고통스러웠다.


우리의 이별은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서로를 더 좀먹기 전에 잘 한 결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분을 삭일 수가 없었다. 스스로를 피해자로, 상대방을 가해자로 정해놓은 지독한 자기 연민에 나를 가둬놓고 이 고통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달라며 목놓아 울었다. 울다가 울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밖으로 뛰쳐나온 거였다. 30분을 걷기도 했고, 1시간을 걷기도 했고, 2시간을 넘게 걷기도 했다. 헨젤과 그레텔은 길을 잃지 않으려고 과자를 뿌리며 걸었지만 나는 이 고통의 길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슬픔을 흩뿌리며 걸었다.


햇빛을 봐서인지 슬픔을 길에 버리고 와서인지 점점 웃음기를 되찾아가던 어느 주말 낮이었다. 그날도 걷고 있었다. 마음을 한 가득 채운 눈물이 빠져나가고 나니 그  속을 샅샅이 찾아볼 수 있었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갉아먹고 있는 걸까. 무엇이 나를 이렇게 못나게 만드는 걸까. 그 원인을 찾고 싶었다. 그건 분명 내 마음속에 있을 게 뻔했다. 간절했다. 이렇게 나를 바꾸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사흘을 거른 길고양이처럼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내딛으며 마음 구석구석을 뒤졌다.


그때였다. 어릴 적 기억 하나가 번개처럼 내리 꽂혔다. 가던 걸음을 멈췄다. 20대 내내 나를 괴롭히던 그 허기, 공허, 헛헛함의 근원이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떠올리기만 해도 애처로운 모습을 한 어린 시절의 내가 보였다. 나에게 일부러 상처를 주려고 한 사람도 없었고, 나조차 그날의 내가 상처를 받은 줄 몰랐다. 문득문득 그날이 떠오를 때가 있었지만 워낙 어릴 때여서 떠오름 그뿐이었다. 그런데 그날 알았다. 그때의 상처를, 불안을, 공포를 평생 극복하지도 털어놓지도 못한 채 살아왔다는 걸.


누구에게나 결핍은 있다. 원하는 모든 걸 가진 사람은 어무도 없다. 다만 그 결핍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이후의 인생이 결정된다. 보통 결핍을 갖고 있으면 그 결핍이 다 채워진 이상적인 나를 그려본다. 나한테 이런 게 있으면 어떨까? 만약 이랬다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다. 인간이 초능력을 가진 어벤져스를 상상하듯. 문제는 내가 가진 결핍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결핍이 채워진 이상향의 나를 분리하지 못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상적인 나를 실제의 나로 인지해서 자의식 과잉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자의식 과잉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대게 당당해 보인다. 강해 보이고, 프로페셔널해 보이고, 심지어 친절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 속에는 초조와 불안이 가득하다. 누가 내 진짜 모습을 알아차리면 어떡하지, 내 결핍을 눈치채면 어떡하지. 하지만 이 차이에서 새어 나오는 불안의 원인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래서 외부의 자극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다. 내 결핍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지나치게 화를 내거나 지나치게 관대했다. 미성숙한 방어기제로 나를 보호하려고 하는 거다.  그렇게 나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비겁을 계속 행하게 된다. 자기 연민이 끔찍한 이유다.


심리치료사 에이미 모린은 <나는 상처 받지 않기로 했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기 연민은 너무도 쉽게 사람을 집어삼킨다.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동안은 내가 진정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자기 행동에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한다.’


20대의 나는 툭하면 화를 내고 툭하면 입을 닫았다. ‘감히 나를 무시해? 왜 나를 인정하지 않아?’ 아무도 건들지 않은 내 열등감을 스스로 부추겨 싸움을 걸었다. 살짝 긁힌 것뿐인데도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반응했다. 때로는  진짜 화를 냈어야 할 순간에 과한 포용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너는 나한테 이런 잘못을 했지만 나는 그런 너도 이해해줄게.’ 내 안의 나를 제대로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나의 행동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에만 신경 썼다. 물을 주지 않아야 할 싹에 물을 주고, 물을 줘야 할 싹에 물을 주지 않으니 마음이 황폐해지는 건 당연했다.


길을 걸으면서 내 결핍을 마주했고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스스로에게 잘못된 채찍질을 얼마나 오래, 많이 하고 있었던 건지 너무 가혹하고 미련해서 집에 돌아오는 내내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겨우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든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활활 타오르던 피해의식의 열기가 많이 사그라들었음을 느낀다. 외부의 자극과 내가 내보낼 반응 사이에 적당한 공간이 생겼다. 상대방이 진짜 나를 무시하는 걸까? 내가 과민반응을 하는 걸까? 생각했다. 그다음엔 대화를 할 용기를 낸다. 내 생각과 상대방의 생각이 다른 건 당연한 것이므로 스스로 결론을 내지 않고 대화로 간격을 좁혀보려고 한다. 여기까지 이르고 나면 화 낼 이유도, 감정도 사라진다. 물론 여전히 화가 치솟을 때도, 억울함에 말이 안 나올 때도 있지만 이내 생각한다. 이마저도 다 지나갈 거라고.


스스로 자각하지 못했던 결핍과 상처를 핑계로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의도했고 또 의도하지 않았던 상처를 준 20대였다. 이제야 진심으로 고마웠다고, 또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과 함께 한 시간 덕분에 내 결핍을 제대로 바라보고 안아줄 수 있었다.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거다. 나를 아끼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아껴주는 어른이 될 거다. 어리석게도 여기까지 오는 데 10년이 넘게 걸렸지만 어쩌겠나 이게 나인 걸. 못난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아 준 내 20대에게 무한한 사랑과 감사를 보낸다. 덕분에 맞이한 소중한 30대를 결코 헛되이 보내지 않겠다고, 그것으로 미안함을 대신하겠다고 수고한 너를 떠나며 다짐한다. 잘 가. 고마웠어. 행복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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