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쿠라 호텔, 로지우라 커리 사무라이, 쓰루가오카하치만궁
(20241105~20241112 도쿄-가마쿠라 여행)
그동안 도쿄 여행을 다니면서 가마쿠라를 두 번 방문했다. 처음에는 슬램덩크 팬으로서 성지순례를 하고자 가본 거였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예뻤던 그 바다 낀 동네는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언젠가는 이 마을에서 숙박하리라 마음먹었다. 여행 가면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한 곳에 머무는 걸 좋아하고, 캐리어 끌고 호텔 옮겨 다니는 걸 귀찮아하는 내게는 꽤나 큰 결심이라 할 수 있겠다. 결국 올해 11월, 나는 도쿄 여행을 와서 가마쿠라에 2박 3일의 일정을 잡았으니.
낮에는 도쿄에서 일하는 친구를 만나 점심을 먹고, 가고 싶었던 ‘괴수 8호 원화전‘에 들렀다. 정말이지 애니메이션 팬으로서 도쿄는 어딜 가나 이벤트가 팡팡 터지는 곳이라니까. 하고 싶었던 걸 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신주쿠의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에 캐리어를 맡겨두기도 했고, 신주쿠에서 가마쿠라로 가는 교통편이 좋았기 때문. 그동안은 당일치기라 가벼운 몸으로 오타큐선을 타고 신주쿠-후지사와 이동하고, 후지사와에서 에노덴을 갈아타고 여기저기 구경 다녔었는데 오늘은 행선지가 호텔이 있는 가마쿠라다. 신주쿠에서 때 맞는 쇼난신주쿠 라인 전철을 타면 바로 가마쿠라 역에 닿을 수 있다. 다만 해당 노선이 오후 시간대에는 한 시간에 한 대 꼴 있기 때문에, 구글맵에서 안내하는 오후 3시 15분 출발의 그 전철을 반드시 타야 했다. 캐리어를 열심히 끌고 달리다시피 한 끝에 해당 열차를 탈 수 있었다. 쾌속 운행선이라 정차하는 역이 적어서 가마쿠라까지는 1시간 조금 넘게 걸린다. 다행히 자리도 있어서 앉아갈 수 있었다. 참고로 해당 전철은 요코하마도 정차하는 전철이라 거기서도 사람들이 많이 타고 내리더라.
쇼난신주쿠 라인 전철을 타고 가마쿠라 역에 내려 호텔까지는 걸어서 10분가량 걸렸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동쪽에 위치해 있어서 겨울에 해가 우리보다 한 시간은 더 빨리 진다. 오후 4시 반만 되어도 어스름이 깔리는 듯. 호텔을 찾아 가는데 슬그머니 해가 지고 있었고, 그 느낌이 이 조용한 가마쿠라 동네에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복작복작한 신주쿠에 있다가 이렇게 여유로운 동네로 넘어오니 마음의 긴장도 한결 풀렸다.
토세이 호텔 코코네 가마쿠라
내가 가마쿠라에서 묵을 호텔은 ‘토세이 호텔 코코네 가마쿠라’. 체인 호텔인데 가마쿠라점은 3층 정도 되는, 호텔치고는 아담한 건물이었다. 리셉션에 가서 카드키를 받고 친절한 직원의 설명을 들었다. 우선 이 호텔의 장점은 대욕장이 있다는 것! 씻을 수 있는 자리가 8개 정도 되는 그리 크지 않은 대욕장이지만, 방의 좁은 욕조와 비교하면 한결 편안하게 몸을 담글 수 있다. 여행 가면 많이 걷게 되는데 숙소로 돌아와서 뜨끈한 물 속에서 피로 푸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정말 좋은 조건이었다. 그리고 리셉션 옆에 무료 커피/차를 마실 수 있는 곳이 있고, 만화책도 무료로 빌려 읽을 수 있다.
만화책을 빌려주는 호텔이라니.. 슬램덩크를 비롯해 원피스, 귀멸의 칼날, 최애의 아이, 하이큐, 체인소맨, 명탐정 코난, 괴수 8호 등 인기 만화 전권이 아주 관리가 잘 된 상태로 진열되어 있었다. 가마쿠라는 상점가를 비롯한 주요 관광지들이 오후 대여섯 시만 되어도 문을 닫기 때문에, 나처럼 혼자 온 여행객들은 이자카야 가서 술 마시는 취미가 있지 않은 이상, 본의 아니게 일정이 일찍 끝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 만화책 서비스가 반가웠다. 그리고 저녁 7시 넘으면 간장에 구운 주먹밥과 재첩국을 잔뜩 넣은 된장국을 야식으로 준다고 했다! 묵는 일수에 맞게 야식 교환권을 주셨다. 나는 많이 먹는 편이 아니라서 ‘굳이 야식으로 이거 먹을 일 있겠어?’ 싶었는데 공짜로 준다고 하니 괜히 먹어 보고픈 인간의 심리.. 결국 첫날 받아서 먹어봤는데 너무 맛있어서 다음날도 받아서 먹었다!
객실은 침대가 널찍하고 편안했고, 테이블과 의자도 있어서 앉아서 간식을 먹거나 만화책을 읽거나 하면서 보낼 수 있었다. 창을 열면 야트막하게 가마쿠라의 민가들이 보이는 것도 좋았다. 창문은 조금 열리는 형태로, 약간의 환기는 된다. 창을 열어두면 멀리서 철도 건널목에 기차가 지나가는 정겨운 땡땡 소리만 들리는 마을. 온갖 차 소리, 오토바이 소리에 밤이 되면 울리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의 신주쿠의 밤과는 비교되었다. 슬리퍼와 호텔에서 제공해 주는 잠옷도 편했다. 그리고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객실에 봉 고데기도 있다는 게 특이했고.
매일 일정을 마치고 들어와서 대욕장에 가서 몸을 담그고, 대욕장 옆의 세탁기로 입었던 옷을 빨래하고, 야식을 받아서 만화책 몇 권을 가지고 방으로 돌아왔다. 따끈하게 갓 구운 간장 주먹밥은 별 재료가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맛있었고, 재첩 된장국은 속을 확 풀어주는 고마운 맛이었다. 특히 된장국은 술 마신 다음날 아침에 먹으면 기운 백 배 날 맛, 장담할 수 있다. 이걸 무료로 주다니, 이 호텔 복 받을 겨.. 야식을 먹고 편의점에서 사 온 감자칩이나 푸딩 따위를 먹으면서 만화책을 읽고 뒹굴거리고 있자니 행복 뭐 있나, 이게 행복이지 싶었다. 여기 와서 탐험한 가마쿠라와 에노시마도 좋았지만, 숙소도 정말로 좋은 숙소를 만났다. 직원분들도 친절하고, 다음에 가마쿠라에 또 와서 여기 머물고 싶을 정도로.
https://maps.app.goo.gl/TiP39U2fJsLqrCrb7?g_st=com.google.maps.preview.copy
가마쿠라 구경
로지우라 커리 사무라이 가마쿠라점
체크인을 마치고 저녁을 먹기 위해 코마치도리 쪽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저녁의 코마치도리는 처음 와본다. 그동안은 당일치기하면서 낮에만 다녔기 때문에. 역시 6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에 도착하니 가게들이 다 접는 분위기였다. 길거리 음식들도 거의 다 팔렸고. 내일 낮에 다시 와보리라 다짐하고 내가 들른 곳은 ‘로지우라 커리 사무라이 가마쿠라점’. 이곳은 북해도 스타일의 수프카레 전문점이고 프랜차이즈라 일본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수프카레를 좋아하는데도 아직 일본에서는 한 번도 못 먹어봤고, 때마침 바람이 꽤나 쌀쌀해서 오늘에야말로 먹어봐야지 싶었다. 이 가게는 코마치도리 거리 사이의 조용한 골목길에 위치해 있다.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고 저녁 영업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는지 가게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자리 안내받아서 앉으니 태블릿으로 주문해 달라고 한다. 요즘은 일본 가게들도 중국처럼 태블릿이나 QR 주문이 많아진 듯. 여기도 직원 인력을 줄이는 걸까.
태블릿을 이리저리 눌러가며 뭘 먹을까 고민하다 치킨이 반마리 들어가고 야채가 12종 들어간 수프카레를 가장 순한 맛으로 주문했다. 밥 양도 정할 수 있는데, 배가 많이 고팠지만 나는 이따 편의점 간식들도 먹을 요량으로 보통 양으로 주문했다. 주문 완료하고 나서야 테이블에 놓인 메뉴판도 구경해 본다. 꽤 실감 나는 실사 사진으로 나와있어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카레가 나오기까지는 10분 이상이 걸렸던 것 같다.
우선 올라간 야채의 볼륨감이 상당했다. 마 같아 보이는 것을 튀겨 올린 것도 있었는데, 신기한 풍미였지만 입에 잘 맞았다. 수프카레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묽지는 않았다. 약간의 꾸덕한 카레 특유의 질감은 느껴질 정도. 매운 걸 잘 못 먹어서 가장 순한 맛으로 주문했는데, 한 단계 매운 걸로 주문했어도 좋을 뻔했다. 너무 순한 맛으로 하다 보니 닭다리의 비린맛이 살짝 느껴졌다. 하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고, 순한 맛의 카레다 보니 말 그대로 국 떠먹듯이 쓱싹쓱싹 긁어먹을 수 있었다. 밥에 딸려온 가라아게도 뜨끈하니 맛있었다. 신주쿠에서 헐레벌떡 달려온 긴장감이 따뜻한 식사로 완전히 풀렸다.
https://maps.app.goo.gl/CTTp9Xd5AFWtCQD29?g_st=com.google.maps.preview.copy
쓰루가오카하치만궁
배를 채우고 나니 어디로든 더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른 시간이라 숙소 들어가기 아까우니 근처의 ‘쓰루가오카하치만궁’을 가보기로 한다. 시간은 겨우 6시를 넘겼을 뿐인데 주변은 깜깜했다. 그래도 아직 사람들이 다니고 있어서 그다지 무섭지는 않았다.
도착한 쓰루가오카하치만궁은 아주 조용했다. 한밤 중도 아닌데. 그런데 발걸음을 내딛을수록 ‘이렇게 사람 없는 쓰루가오카 하치만궁을 거닐 수 있다니, 이거 오히려 행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이곳은 가마쿠라의 대표 관광지로서 낮에는 사람이 득시글 하기 때문. 하지만 지금은 조용하다 못해 스산한 기분마저 들었다. 주변도 조용하고 계단을 오르는 나 자신의 발소리만 들렸다.
이곳은 무예의 신을 모시고 있는 신사로 유명하다. 가마쿠라 막부를 탄생시킨 무장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1191년 건립했다고 한다. 최근에 ‘도망을 잘 치는 도련님’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봤는데, 그 애니메이션은 가마쿠라가 배경으로 가마쿠라 막부가 망한 뒤 그 복수를 다짐하는 호조가의 도련님 이야기다. 역사를 기반으로 판타지를 약간 섞은 애니메이션인데, 그걸 보고 와서 그런지 뭔가 조금 더 가마쿠라를 이해하게 된 느낌이었다.
전에는 봄에 쓰루가오카하치만구에 왔었는데, 그때는 사람들에 치여 금방 둘러보고 쫓기듯 나왔었다. 오늘은 사람도 없겠다, 최근에 양궁에 재미를 들였기 때문에 활 잘 쏘게 해달라고 빌었다. 본당을 둘러본 뒤 내려가는 계단을 앞에 두고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초승달이 떠있었다. 뭔가 다 잘될 것 같다는 이유 없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이곳은 그래도 신력이 강한 곳일 거고, 인간으로서 대단했던 존재를 모시는 곳인데 쪼잔하게 국적 가지고 차별하지 않겠지, 하는 생각. 내 소원도 들어달라고요! 하는 다소 세속적인 투정을 부려보았다.
https://maps.app.goo.gl/cnwd1HWxAwEV8MZa9?g_st=com.google.maps.preview.copy
신사에서 나와 호텔로 가는데 ‘도망을 잘 치는 도련님’ 컬래버레이션 호텔이 등장했다. 그렇지, 콘텐츠 컬래버레이션이 이토록 발달한 일본에서, 가마쿠라 배경지인 이 만화를 가마쿠라가 놓칠 리가 없지. 호텔과 콜라보해서 한정 굿즈를 선물로 주나 보다. ‘이런 걸 미리 알았다면 이 호텔에도 묵어봤을 텐데’하고 오타쿠 같은 생각을 하며 하루를 마무리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