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쿠라코코마에, 에노시마 신사, 치고가후치 비경
가마쿠라의 밤은 조용했다. 구급차인지 경찰차인지 모를 요란한 사이렌이 울리는 신주쿠의 밤과는 전혀 다른 고요함 속에서 푹 자고 일어났다. 오늘은 에노시마를 둘러보고, 가마쿠라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 중 하나인 ‘하세데라’를 방문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가마쿠라가 어떤 곳인가. 슬램덩크 애니메이션 오프닝 장면에 나온 가마쿠라코코마에 역이 있고, 썰에 의하면 능남고교의 배경이 되는 고등학교가 있는 곳 아닌가. 슬램덩크를 사랑하는 나는 저절로 에노덴에 올라 가마쿠라코코마에 역을 향하고 있었다. 오늘은 에노덴을 타고 이곳저곳 다닐 예정이었기에 가마쿠라역에서 에노덴 1일 무제한 패스인 ‘노리오리쿤’을 샀다. 가격은 800엔, 그리 싸지 않지만 에노덴을 몇 번 타고 내리는 걸 가정하면 그때 그때 돈 낼 필요 없이 패스권을 사는 게 가성비 좋고 마음 편하다. 가마쿠라에서 숙박을 하니 아침 일찍부터 에노덴을 탈 수 있어 좋았다. 물론 나보다 부지런한 관광객들이 많아서 에노덴이 한산하지는 않았지만.
에노덴은 탈 때마다 느끼지만 정말이지 그 특유의 레트로한 느낌이 좋다. 초록색의 정감 가는 외관도, 낡은 창도, 바닥도. 느린 속도로 덜컹거리며 철도를 밟아나가는 느낌도. 넓은 창 너머로 소담한 마을이 지나고 넓디넓은 바다가 펼쳐질 때 느껴지는 감정.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일종의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질 법한 풍경이다. 좋아하는 영화 ‘운명: 가마쿠라 이야기’의 ost를 들으며 에노덴을 타고 있으니 감동 두 배. 행복해서 눈망울이 촉촉해졌다. 이렇게 혼자 여행하다 보면 오롯이 내 시간을 내 마음대로 내 감정의 폭대로 즐길 수 있어서 벅차오르는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그 감성의 폭주가 싫지 않다. 그게 혼자 여행하는 묘미 아니겠어요. 바다가 보인다면 곧 가마쿠라코코마에 역(가마쿠라고등학교 앞역)이 나오고, 슬램덩크 성지인 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역에서 내린다.
슬램덩크 성지,
가마쿠라코코마에 역
나는 이번이 세 번째 방문. 이번에도 야무지게 챙겨 온 서태웅 피규어, 애칭 띠웅이를 꺼내서 인증샷을 찍었다. 애니메이션 오프닝을 흉내 내려면 에노덴이 사진에 살짝 걸려야 하는데, 문제는 이 에노덴이 한 시간에 한대 꼴이라 하나 지나가고 나면 15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 에노덴이 지나가는 순간에 인증샷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래서 관광객들끼리 감정 상하기도 한다. 내가 갔을 때도 어떤 한 커플이 좋은 자리를 선점한 채 비켜주지 않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눈치를 주고 있던 터였다. 멋진 사진 찍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매너를 지킵시다! 그리고 좋은 사진을 건지려고 찻길까지 나가서 사진 찍는 사람들이 있어서, 전에는 그게 꽤 위험해 보였는데 이제는 현장을 통제하는 관리 직원분이 한 분 생긴 듯했다. 다행이다.
띠웅이로 성지순례 인증샷을 찍고 있으니 옆에 계셨던 한국 여자분 두 분 중 한 분이 ‘어머 우리 딸도 저러는데~’하면서 말을 붙여오셨다. 요즘 젊은이들이(?) 인형이나 피규어 가지고 인증샷을 많이들 찍는데, 따님이 하는 행동을 여기서 똑같이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니 반가우셨나 보다. 나도 한국인인걸 아시고는 혼자왔냐며, 사진을 찍어주시겠다 하셨는데, 이 포즈 저 포즈를 요구하시더니 에노덴 지날 때의 인증샷까지 멋지게 남겨주셨다. 여기 기다리고 있다는 건 본인도 사진 찍으려고 하셨다는 건데, 에노덴과의 촬영 기회를 내 사진 찍어주느라 날리시다니.. 나 때문에 이 분은 또 15분을 기다리셔야 할 거 아냐. 자기는 친구랑 와서 괜찮다고 하시는, 마지막까지 친절하셨던 어머님.. 따님은 10대겠죠, 사실 전 30대 직장인입니다. 하지만 당신을 엄마라고 부르고 싶었어요. 혼자 여행하며 가끔 겪는, 마음 따뜻해지는 순간이었다.
성지 순례 자리에서 사진을 찍고 언덕 쪽으로 올라가면 가마쿠라고등학교가 있다. 이곳이 능남고교의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즉, 윤대협이 다닌 학교였다는 거지. 여기도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는지 학교 앞에 사진촬영 관련한 안내가 붙어있었다. 입구에서 사진 찍는 건 가능하지만 학교 내부나 학생들이 나오게 하지 말라고. 학교 내부로 들어오는 것도 금지다. 하긴, 관광객들이 몰려들면 학생들이 너무 불편할 것 같다. 학교 명패 앞에서 띠웅이와 인증샷을 후다닥 찍고서는, 에노덴을 타고 에노시마로 향했다.
에노시마 가는 길
에노시마 역에 내렸는데 에노덴 역사를 전시해 둔 곳이 있어서 구경했다. 에노덴은 1974년에 개통했나 보다. 그런데 그때와 지금의 모습이 크게 차이가 없다. 굳이 현대화하지 않은 것이 신의 한 수인 듯, 에노덴만의 느낌과 개성이 독보적이다.
에노덴에서 내려 에노시마를 향해 걷는다. 상점가를 지나 지하도를 타면 에노시마 대교로 진입한다. 작년 3월에도 에노시마에 갔었는데 그때는 날씨가 엄청 요란했다. 비가 올 것처럼 하늘이 꾸물거리더니 에노시마 신사를 한창 구경하는데 비바람이 몰아쳤다. 어쩔 수 없이 챙겨갔던 작은 우산을 쓰고서 대교를 건너서 역으로 후퇴했는데, 이곳은 섬인지라 비바람이 워낙에 거세서 우산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쫄딱 젖어버렸다. 그 와중에 대교를 걸으며 몰아치는 바람에도 부서지지 않은 내 우산 칭찬해.. 비가 사방에서 몰아쳐서 우산을 내리니 앞이 보이지 않고, 우산을 올려서 전방을 보며 걷자니 비바람이 얼굴을 때리는, 그런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때 내 앞에는 일본 고교생으로 보이는 남자애들 셋이 우산 두 개를 나눠 쓰며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 열악한 상황에서 아웅다웅하면서도 굳이 셋이서 끝까지 나눠 쓰며 걷던 모습이 인상깊었다. 그냥 가위바위보 해서 이긴 두 사람이 우산 하나씩 쓰고 진 사람은 뛰어가지. 굳이 셋이서 우산 두 개 써서 결국 셋 모두 비 다 맞고.. 하지만 그것이 청춘 아니겠나. 바람이 너무 거세서 자칫하면 다리에서 떨어져 바다에 빠질 것만 같이 무서웠던 순간, 내가 뭐 때문에 여기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일기예보에 늦은 오후부터 비 올 거라고 했는데, 그걸 봤으면서도 여기저기 구경하고 간식 사 먹고 하느라고 예정보다 늦게 움직인 나 자신을 탓해야지. 당시에는 목숨의 위협을 느꼈으나 시간이 지나 기억은 미화되고, 나는 이 날을 ‘비바람 몰아친 에노시마의 모험’으로 기억하고 있다. 내게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으니 됐다. 그때 실성한 사람처럼 웃으며 대교를 건넜던 전우들, 모두 잘 살고 있으려나. 실없는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에노시마에 당도했다.
에노시마 신사
가장 먼저 들를 곳은 에노시마 신사였다. 신사로 가는 언덕길에 상점가가 있다. 소소한 기념품이나 타코전병이나 당고, 아이스크림 같은 먹거리를 파는 노점도 있고. 에노시마 신사는 계단이 많기로 유명해서 당을 좀 채워 넣어야겠다 싶어서 간장 당고(미타라시 당고) 하나를 사서 가게 앞에 앉아 먹었다. 말랑 쫀득한 떡에 달콤 짭짤한 소스가 얹어진 간장 당고.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이제 기합으로 에노시마 신사 계단을 오른다. 사실 여기는 에스컬레이터도 있지만, 나는 무조건 계단 파. 아직 젊잖아? 하는 허세도 조금 있고. 헥헥대며 계단을 올라가서 도착한 신사에서 호흡을 고르며 내려다보는 풍경이 꽤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최근에 ‘봇치 더 락(외톨이 더 락)’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봤다. 거기 주인공이 사회성이 다소 결여된 고등학생인데,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생각으로 기타를 열심히 연습해서 꽤나 실력자가 되었다.(아무래도 기타한다고 하면 애들 사이에서 좀 멋지게 보이니까? 그 사고방식이 너무 귀엽다) 그러나 기타 연습만큼 인간관계 만들기 연습은 되지 않아 고민하던 차, 우연히 밴드에 들어가게 되었고, 친해진 밴드 멤버들과 여름방학에 에노시마에 놀러 가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그 에피소드에 등장한 것이 바로 이 에노시마 신사. 애니에서도 주인공이 계단 오르며 녹초가 된 장면이 나오는데, 봇치를 생각하며 오르니 뭔가 계단 오르기가 하나의 재밌는 미션이 된 것 같았다. 오타쿠의 삶이 이렇게 재미있습니다, 여러분.
참고로 에노시마 신사는 예능의 신도 모시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방송계 관련한 사람들이 와서 소원을 빌고 간다는 듯. 연예계 관련한 일이 하고 싶다면 여기서 소원을 빌어봅시다. 세전함에 동전을 던져 넣고(주로 100엔), 고개를 꾸벅 두 번 숙이고, 박수를 두 번 짝짝 친 뒤, 눈을 감고 소원을 빌고, 고개를 한 번 숙이며 마무리 인사드리고 나오면 된다. 강아지를 데리고 온 사람들도 많던데, 여기 반려동물의 건강을 빌어주는 신도 있는 걸까나.
치고가후치 비경
지난번에 왔을 때는 날씨 때문에 에노시마 신사에서 물러났지만 오늘은 하늘도 푸르고 바람도 잔잔하니 치고가후치 비경까지 보리라 다짐했다. 아무래도 신사에서 치고가후치까지 연결된 길은 없는 듯해서 신사 계단을 다시 내려왔다. 에노시마 신사 입구에서 계단을 오른다고 생각하고 선 방향에서 오른쪽을 보면 붉은 다리가 보이는 길이 있는데 그 길로 가면 된다. 나는 구글 맵을 보고서도 길을 못 찾아서 상점가를 다 내려갔다가 다시 거슬러 올라왔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 이라기보다 운동을 했다고 생각하자, 긍정적으로!
길은 하나밖에 없어서 그대로 쭈욱 걸으면 된다. 산길인데 걷다 보니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새소리만 들리고. 이게 맞는 걸까 의심이 드는 순간 바다가 샥 펼쳐진 풍경이 보였다. 바다가 포기하지 말라는 것 같아서 ‘그래, 한 번 가보자. 가다가 아니면 다시 돌아 나오면 되니까’ 하는 생각으로 10분 정도 걸었을까, 상점가가 나와서 길을 잘못 든 건 아니구나 하고 안심했다. 여기도 신사가 있었고, 참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섬 안쪽에 있어 에노시마 신사만큼 붐비지는 않았지만 구글맵으로 보니 ‘오쿠츠미야 에노시마 신사(Enoshima shrine Okutsumiya)’인 듯했다.
신사에서 한숨 돌린 것도 잠시, 본격적으로 치고가후치까지 내려가는 것도 계단 지옥이다. 심지어 에노시마 신사보다 더 가파르고 계단 수도 많아..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수 없지, 하고 힘내서 내려가 본다. 내려가는 건 올라가는 것보다는 수월하니까 폴짝거리며 걷고 있는데, 헉헉 거리며 올라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나중에 나도 돌아올 때는 네발로 기어올라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려가는 계단들 사이에 음식점들도 있어서 쉬고 싶다면 거기서 마실 거 한 잔 하며 쉬어가도 좋을 듯했다.
그렇게 몇 백개나 될지 모를 계단들을 후들거리는 다리로 내려가니 탁 트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낚시꾼들이 낚싯대를 드리운 풍경. 파도가 밀려와 바다에 부딪히는 소리가 퍼지는 조용한 곳. 계단을 걸어 내려오느라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는데, 내 폐부에 푸른빛 공기가 들이닥치는 느낌이었다. 하늘의 파랑과 바다의 파랑이 맞닿은 풍경,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들이다.
반가운 마음에 바위 위로 걸음을 옮겼다. 짠 기운이 섞인 바다 바람이 흘러내린 땀을 식혀주었다. 어떤 장애물도 없이 바다를 마음껏 볼 수 있는 곳이구나. 퓌이퓌이하는 솔개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데,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아서 가만히 풍경을 바라보고 싶었다. 하지만 바위는 바닷물로 젖어 있어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에노시마의 바다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았다. 치고가후치 ’ 비경(秘境)‘이라더니, 과연 비경이다. 암석에 고인 바닷물 속에 게나 작은 물고기들이 있어서 그걸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여기 우리 뿌꾸 데려오면 난리 나겠네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주의력이 약한 강아지는 이성 날아가기 딱 좋은 곳이다. 근처에 꼬마가 작은 물고기 보고 신나서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귀여웠다.
참고로 여기는 특별히 울타리 같은 안전장치도 없기 때문에 각자 알아서 조심히 다녀야 한다. 보니까 에노시마로 들어오는 대교에서 작은 페리를 운영하던데, 그걸 타면 여기 근처 선착장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듯. 나는 그걸 모르고 계단 몇 백개를 오르내리며 고생을 했구먼. 이곳까지 구경할 생각이라면 에노시마 대교에서 배 타고 여기로 들어와서 구경하고, 에노시마 신사를 거쳐서 육지로 돌아가면 효율적인 동선이 나올 것 같다. 바다 외에는 별다른 이벤트가 없는 곳이지만, 이런 곳에 오면 왜 이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라보게 될까. 정신을 차리고 근처에 있는 다음 행선지인 이와야 동굴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