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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효진 Sep 02. 2024

남편 벌초하러 갈 때 같이 가시나요?

추석 티저 행사 벌초에 대한 단상

'사촌형님이 벌초하러 이번주 일요일 새벽 6시까지 오라는데?'

코로나, 출장으로 최근 몇 년간 벌초에서 열외였던 남편이 드디어 벌초에 소집되었다. 큰집 형님은 작은 집 막내인 남편과 나이 차이가 꽤 있다. 삼촌뻘 정도라서 사촌형님은 주로 남편의 형에게 일정을 알려주시고 형이 남편에게 일정을 알려주시는 순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직접 연락을 주신 것이다. 이번에는 꼭 오라는 무언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남편 시골 큰집은 충북 괴산이다. 우리가 사는 수도권에서 그리 멀지는 않지만 또 마음먹고 가자면 좀 부담스러운거리일 수도 있다. 세시간 거리를 새벽 6시 도착하려면 새벽 2,3시에는 출발해야 한다는 계산이 선다. 아무래도 야간 운전하고 바로 고된 벌초 작업은 힘들 것 같아서 전날 내려가야 하는 스케줄이 되었다. 날이 워낙 더우니 새벽에 시작해서 오전 중에 벌초를 끝내려면 어쩔 수 없다.


운명적인 벌초 여행은 벌초하는 날 이틀 전에 성사되었다.

아이가 대뜸 벌초하러 같이 가겠다는 것이다. 남편은 옳다쿠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 바로 승낙을 하였다. 그러면서 흐믓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았다. 벌초 하는동안 아이를 보아야 하니 나도 어쩔 수 없이 가야하지 않겠냐는 의미였다.


신혼 때 한번 남편과 함께 벌초하러 내려간 적은 있었다. 가서 벤 풀만 한 데 모으는 정도로 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남편의 조상님께 인사드리는 정도였었다. 그 이후에는 남편 혼자 가거나 그마저도 코로나, 출장과 겹치면서 못간 해도 많았다.


'그래 오랜만에 벌초로 사촌 아주버님, 형님들 뵙고 좋지 뭐'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굳이 나까지 가서 큰집 번거롭게 하는 것은 눈치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이 더운 여름날 시골집에서 몸 불편할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굳이 나까지 데려가야만 했냐.'

남편의 물귀신 작전에 서운한 것도 있었는데 정작 남편은 기왕 내려가는 김에 마당에서 고기도 구워먹고 여행, 캠핑 삼아 슬쩍 내려갔다 오자면서 설레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다. 아이와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고 경험도 많이 시켜주자고 했더니 남편은 이번 기회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두통이 밀려오고 내려가는 토요일 아침에는 늦잠까지 자버렸다. 나도 어쩔 수 없는 K며느리라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까지도 스트레스를 받는 건가싶어서 얼른 정신을 차렸다. 나의 옹졸함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기왕 내려가기로 한 김에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가져보기로 하였다.  


막상 내려가다보니 흥이 올랐다.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먹기 위해 장을 보면서 고기는 몇인분을 사야할지 숯이며 착화제며 쌈장, 야채 등등 챙겼다. 큰집에 도착해서 큰집 큰 어머님과 아주버님과 형님의 환대를 받고 짧은 근황토크 후에 본격적으로 저녁 준비를 하고 뒤늦게 도착한 다른 아주버님과 형님과 2차 근황토크와 아이의 재롱 리사이틀로 밤 12시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음날 새벽 아내들은 아침을 차리고 필요한 것들을 챙겨 짐을 싸주고 남편들은 벌초하러 선산으로 떠났다. 나는 아이와 동네 한바퀴를 돌면서 큰집 동네의 정자, 운동기구, 골목, 이름모를 꽃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형님들은 밭에서 농약 하나도 뿌리지 않고 키운 깻잎, 늙은 호박, 애호박, 호박잎, 고추, 대파를 따오고 가져가기 좋게 싸주셨다. 애호박 부침의 양념은 어떻게 하는지, 깻잎 장아찌는 어떻게 만드는 지 레시피를 공유받기도 하였다.



명절을 앞두고 조상들이 묻힌 선산 묘를 깨끗하게 정리하는 일이 단순한 노동만은 아니다. 한 해 동안 타지에서 일상을 보내는 친인척들이 이런 기회로 한번씩 모여 가족이 되는 소중한 시간인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묘를 살피어 잡초를 뽑고 주변을 환하게 만드는 동안 우리의 마음 속 엉킨 생각들도 말끔히 정리가 되겠지. 어린시절 따뜻하게 보듬던 어른들이 나를 다시 인자하게 바라보아주시겠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아이도 시골집에서 부모말고 자기를 어여삐 여기는 친척 어른들 사이에서 사랑을 받으며 시골 별들을 눈에 넣어보는 시간이 한껏 흥에 겨웠나보다. 큰집에서 평소의 에너지 두배를 쓰고는 돌아오는 차에서 내내 코를 골며 잠을 잤다.


벌초하러 남편과 함께 내려가길 잘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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