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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키뉴 May 22. 2024

검정 코트

오늘은 반드시 그 일을 해내고 말거야. 꽤나 오랫동안 미뤄 온 일이라 할 수 있겠어. 바로, 우리의 이별이란 말이지.


널 처음 본 건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서였어. 필요를 느끼는 사람이 기웃거린다는 그곳. 여전히 많이들 그런다고 해. 사실 나도 그러고 있고. 근데 최근에는 그런 데서 필요를 채우는 사람을 흉보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고도 해.


돈을 보냈어. 네가 마음에 든다고, 그러니까 여기로 오라고. 확신 같은 게 있었던 건 아닌 것 같아. 마음에 안 들면, 다시 가라고 하면 될 거라 생각했거든. 이걸 이제서야 말하네. 미안해.


꽤 오래 기다렸을 거야, 너는. 그날은 추웠던 걸로 기억하는데. 근데 넌 조금도 서운해하지 않았어. 나도 딱히 미안한 건 아니었지만. 난 별 다른 말 없이 그냥 널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지. 그리고 곧 우린 한 몸이 됐잖아. 기억나니? 추위에 떨어서인지, 네 몸은 찼지만 네 안은 참 따뜻했어. 그날 이후 크리스마스를 한 세 번 정도 같이 보낸 것 같네.


근데 그게 다였지. 네 번째 크리스마스는 없었어. 다른 사람이 생겼거든. 그렇게 넌, 내 마음 속 방 한 편에서 빛을 잃어갔던 거 같아.


난 왜 너를 만나게 되었을까? 그때쯤 난, 딱 너같은 누군가를 원하고 있었거든. 길고 매끈하게 빠진 몸매에 전체적으로 어두운 모습이 시크해 보였달까? 아니면 세련돼 보였달까? 신비롭단 생각도 한 거 같아. 사실 너같은 스타일은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애는 딱 관상용, 이라는 어중이떠중이들이 하는 말이 그땐 떠오르지 않았어. 그래 맞아. 외모. 그게 내가 널 선택한 유일한 이유라 할 수 있겠어.


이유가 있는 사랑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그, 이유라 할 만한 그런 게 그 사람에게서 사라지면, 그 사랑은 더 이상 유효할 수 없다는 거. 다른 사람이 그보다 더한 걸 줄 수 있다면, 역시나 더 이상 유효할 수 없을 테고 말이야. 그래 맞아. 난 이유 있는 사랑을 했지. 그리고 그 이유가 없어진 거고. 이젠 더 이상 내 눈에 네가 예쁘지 않아. 그 사람이 너보다 더 예쁘거든. 너랑 함께 다닐 모습을 상상하면 쪽팔린단 생각도 드는 게 사실이야.


먼지 쌓여가는 네 모습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긴 했어. 그렇다면 말이야, 그렇게 마음이 바뀐 거라면 말이야, 일찌감치 이 관계를 정리해야 하겠다고. 근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더라고. 내 몸은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나 봐. 네 안의 그 따뜻함을 언제고 다시 원할지 모를 일이니까 말이야. 넌 내가 부르면 곧장 올 거잖아. 넌 늘 그런 애였으니까. 단념을 못하고 그렇게 시간을 끈 건 내가 맞아. 그냥 하염없이 가둬뒀던 거지.


그런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더럽단 생각. 너 하나에서 그치지 못하고 그곳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드는 불나방 같았달까. 내가 바로 그런 놈이란 생각이 들었단 거지. 욕심쟁이야.


넌 나 하나 바라보며 늘 그곳에 서 있었지. 벌을 받는 기분이야. 너가 무슨 거울 같았거든. 내 변심을 까발리는 그런 거울. 일편단심 같은 걸 맹세한 것도 아닌데 말이야. 어쨌든. 그게 벌이었다면 달게 받았어야 할 테지만, 마음이 좀스러워 그런지 그거 하나 참아내기도 여간 쉬운 게 아니더라.


이젠 너만 보면 짜증이 나. 이 짜증을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말이야. 그래 그거야. 너랑 헤어지기로 결심한 건, 널 위해서가 아니야. 날 위한 거지. 널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이야길 더 나눠 봐야 바뀌는 건 없을 거야.


우리 언젠가 우연히 마주치기도 하겠지. 물론, 난 널 알아볼 수 없을 것 같아. 그렇다고 너무 서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 닮은 누군가를 혹시 보게 된다면, 이 세상 어디선가 빛 발하고 있을 너를 기억할게. 그때 내 곁에 있을 때처럼 말이야. 그리고, 전에 우리 좋았던 모습을 추억할게. 추운 겨울, 한 몸 되던 그 아름답던 우리의 모습을. 이걸로 퉁치는 거야. 그럼 안녕.


그를 건네받으며 점원이 말했다.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가시나 봐요.” 나는 그렇게, 아름다운 가게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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