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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oho Jun 21. 2022

나에겐 초능력 _ 술

여전히 조금 아쉽기는 해





  아빠는 가족 식사 자리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말씀하신다.

  “네가 술을 마시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나를 가리켜서 하는 이야기다. 그 뒤에 생략된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나는 엄마를 닮아서 술을 한 잔만 마셔도 정수리부터 빗장까지 전부 붉게 변신한다. 누가 봐도 얼큰하게 취한 사람처럼 보인다. 인사불성으로 취하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몇 잔을 더 마셔버리면 정말 금세 취하고 만다. 

  빨개지면 어떠냐는 인식이 나에게는 없어서 이십 대 초반에는 가능하면 가장 어두운 술집을 선호했다. 그래도 티 나는 건 똑같지만 그래야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했다. 그마저도 몇 년이 지나자 점점 술자리를 갖지 않게 되었고 어쩌다 그런 자리에 가더라도 안 마시고 마신 사람처럼 즐길 줄 아는 능력을 발휘해 더는 알코올을 입에 대지 않게 되었다. 다행히 내가 직장생활을 할 무렵부터 술 권하지 않는 사회가 더 일반적인 모습이 되었다. 적어도 나는 술로 인해 부당한 취급을 받으며 살지는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다행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시간이 쌓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는 아예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맛을 알아야 취하더라도 마실 수 있을 텐데 지금도 가끔 남편 술잔을 가져다 슬쩍 입술을 적셔보고는 바로 고개를 젓는다. 도통 알 수가 없다.     


  이런 면에서 나는 정말 재미없는 사람 같다. 술을 잘 마시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맛을 알면 얼마나 좋을까. 잠이 오지 않는 밤에 한 잔, 좋은 친구를 만났을 때 반가워서 한 잔,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며 오늘도 고생했다고 남편과 한잔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술보다는 건배가 마음에 들고 잔을 비운 다음에 상대방에게서 나올 진심 어린 말들이 궁금해서 그런 세계를 모르는 내가 참 재미없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억지로 분위기를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참 안타깝다.

  예전에 조금씩 마시다 보면 늘겠지라는 생각으로 저렴한 와인을 사다 두고 밤마다 혼자 홀짝이던 때가 있었다. 가장 작은 와인잔 반 정도를 채우고 소꿉놀이하듯 마시면 처음에는 기분이 좋은가 싶다가도 금세 취기가 올라와 어지러워졌다. 뭔가를 할 수도,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상태로 거실과 방을 오갔다. 할 수 있는 일은 텔레비전을 보는 정도였는데 그마저도 집중이 되지 않아 소파에 누운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밤을 지새우는 일이 곤혹스러워서 몇 번 하다가 그만두었다. 

  지금 와인잔에는 작은 다육식물이 들어가 자라고 있다. 마치 처음부터 제자리였던 것처럼.     


  간혹 새로 알게 되는 사람들에게서 술을 잘 마시게 생겼다는 말을 듣는다. 아예 못 마신다고 하면 의외라는 듯 내 얼굴을 가만히 뜯어본다. 술을 잘 마시게 생긴 얼굴은 어떤 얼굴일까. 하도 그런 말을 많이 듣다 보니 이제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내가 모르는 세계에서는 나처럼 생긴 사람들이 건배사를 하고 옆자리 빈 잔을 채워주나 보다 하고.


  나는 술잔 대신 커피잔으로 남편에게 건배를 해주고 함께 마른안주를 집어먹으며 대화를 나눈다. 아빠 말씀처럼 내가 술을 마시지 못해 다행인지도 모른다. 아마 좋아했다면 온 우주의 힘을 모아 열심히 마셨을 것이다. 그럼 내가 잃게 될 것들이 가만 보자….

  그래도 다음 생이 있다면 술을 잘 마시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 야. 괜찮아. 한잔해. 한잔하고 다 잊어. 그런 허세 섞인 말을 해봤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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