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시민이 가장 자주 찾는 박물관은 어디일까요? 러시아의 명화를 모아놓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아니면 러시아 역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국립역사박물관? 둘 다 아닙니다. 정답은 바로 지하철역입니다. 모스크바의 지하철역은 웅장한 규모와 화려한 인테리어로 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예술미를 갖추었기 때문이지요.
모스크바 지하철은 1935년 5월 15일 첫 번째 라인이 개통되었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사회주의 국가인 구소련 시절이었어요. 희대의 독재자인 스탈린이 통치하고 있었지요. 스탈린은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전 세계에 과시하려는 야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하철 공사에 참여한 건축가와 예술가를 불러 소련의 찬란한 미래상을 반영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로 인해 모스크바 지하철은 소련 역사상 가장 사치스런 건축물로 탄생했어요. 벽과 바닥은 값비싼 대리석으로, 드높은 천장은 예술적인 벽화로 꾸며졌지요. 심지어 지하의 어둠을 밝힐 등불로는 호화로운 샹들리에가 설치되었습니다. 실로 소련이 지향하는 사회주의의 이상향을 구현한 궁전과 다름이 없었어요. 인민들은 매일같이 지하철역을 오가며 소련의 위대함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1938년 9월 11일 문을 연 마야콥스카야(Mayakovskaya) 역입니다. 개통 당시 역을 둘러본 알렉세이 푸시킨은 그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했어요.
수천의 군중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매일 플랫폼으로 모여들어 환호성을 질렀다.
모스크바의 지하에 이런 것이 있다고는
믿기 어려웠다.
마야콥스카야 역은 1938년 미국 뉴욕에서 개최된 세계 지하철 품평회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했습니다. 적지인 미국에서 사회주의 소련의 위상을 드높인 셈이었지요. 지하철을 통해 체제의 우위를 과시하려던 스탈린의 의도가 결실을 맺은 순간이었습니다.
모스크바 지하철의 탄생에 정치적인 의도가 깔린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까지도 예술미 넘치는 지하철역들이 계속해서 지어지고 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가장 가까운 박물관은 지하철역’이라는 말이 있듯이, 시민들이 가장 손쉽게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인 셈입니다. 예를 들어 도스토옙스카야(Dostoyevskaya) 역을 살펴볼까요? 이 역은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evskii)를 기념해 명명되었습니다.
역으로 들어서면 도스토옙스키의 거대한 얼굴이 이용객을 맞이합니다. 계단 오른쪽 벽에는 중절모를 쓴 남자가 바삐 계단을 내려가네요. 마치 이용객 틈에 섞여 어딘가를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남자는 『죄와 벌(Crime & Punishment)』의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인 것 같아요. 아마 하숙집 계단을 내려와 살인을 저지르러 가는 길일 겁니다. 한 때 대학생이었던 라스콜리니코프는 어느 날 고리대금업자인 노파를 죽입니다. 그런데 가난해서 굶주리는 처지인데도 훔쳐간 금품을 땅에 묻고 손도 대지 않아요. 노파를 죽인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니랍니다. 자신이 타인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이’인지, 아니면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인간’인지 알아보는 것이라는군요. 웬 정신병자가 살인을 저질러 놓고는 얼토당토않은 변명을 늘어놓는 것처럼 들리지요? 하지만 훔쳐간 금품을 사용하지 않은데다, 자기도 가난한 주제에 빈민들을 도와온 점을 보면 단순 강도는 아닌 것 같아요. 게다가 사건 수사가 지지부진한데도 제 발로 경찰서를 찾아와 자수까지 했으니 이 남자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갑니다.
위 사진은 플랫폼 벽에 그려진 『죄와 벌』의 장면들입니다. 왼쪽에 라스콜리니코프가 도끼로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이 그려져 있네요. 노파를 죽인 그는 우연히 이 장면을 목격한 노파의 누이까지 살해하고 맙니다. 죄 없는 인간까지 덤으로 살해한 라스콜리니코프의 번민은 더욱 깊어지지요. 결국 라스콜리니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네바 강변을 배회하며 자살할 생각까지 합니다.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뛰어들까말까 갈등하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모습이 보이네요.
하지만 라스콜리니코프는 강물에 뛰어드는 대신 신앙심 깊은 처녀 소냐를 찾아갑니다. 오른쪽에 소냐가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신약성서를 읽어주는 장면이 있네요. 예수 그리스도가 라자로를 부활시키는 구절이지요. 예수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장면은 라스콜리니코프가 헌신적인 소냐의 사랑을 통해 부활하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지요.
지하철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대문호의 작품을 음미할 수 있다니 매력적이지 않나요? 바쁘고 고된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문학의 향기에 취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박물관’이라는 타이틀이 아깝지 않습니다. 실제로 저는 벽화들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지하철을 타고 도스토옙스카야 역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플랫폼을 오가며 제가 읽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과 벽화를 일일이 맞추어보았지요. 웬만한 박물관보다 훨씬 만족스러웠다면 과장일까요?
모스크바에는 이외에도 예술미 넘치는 작품들로 장식된 지하철역이 넘쳐납니다. 그 중에서도 ‘혁명 광장’이라는 이름답게 사회주의 혁명을 이끈 인물들의 동상으로 채워진 플로샤디 레볼류치(Ploshchad' Revolyutsii) 역, 대리석 조각으로 장식된 웅장한 내부와 색유리 모자이크 화가 볼만한 콤소몰스카야(Komsomol'skaya) 역은 빼놓을 수 없는 명소입니다. 지하철 요금 850원만 내면 하루 종일 지하철역을 돌며 예술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셈이지요. 모스크바에서는 하루쯤 시간을 내서 지하철역 투어를 해보면 어떨까요?
모스크바 지하철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는
어느 멋진 일주일 : 러시아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