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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이당주 May 19. 2015

천재시인 푸시킨의 결투
-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작가’라고 하면 누가 먼저 떠오르나요? 한국인은 대부분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를 떠올릴 겁니다. 하지만 러시아인은 아니에요. 누구나 알렉산드르 푸시킨(Aleksandr Pushkin, 1799-1837)을 첫손에 꼽지요. 러시아의 정서를 반영한 그의 작품세계도 매혹적이지만, 어쩌면 푸시킨의 드라마틱한 죽음이 그의 이름을 더욱 높여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미모의 아내가 불러일으킨 결투

1837년 1월 27일 푸시킨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에 있는 카페에 들릅니다. 2층 창가에 앉아 크랜베리 주스 한 잔을 시켜요.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빠지지요. 그의 머릿속은 오후 5시에 있을 결투로 가득합니다. 과연 총탄에 쓰러질 자는 누구일까? 나일까? 아니면 당테스일까?

나탈리야의 초상 by 이반 마카로프, 1849

푸시킨이 목숨을 건 결투를 벌이게 된 이유는 아내 나탈리야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1828년 모스크바의 무도회에서 처음 만났어요. 당시 16살이던 나탈리야는 그야말로 절세미녀였습니다. 러시아 사교계의 호남아로 이미 100여명의 여인과 염문을 뿌린 푸시킨조차 한 눈에 반하고 말았어요. 결국 푸시킨은 끈질긴 구애 끝에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1831년 나탈리야와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이제 한숨 놔도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거예요. 나탈리야가 밤마다 무도회를 들락거리더니 단숨에 사교계의 여왕이 된 겁니다. 심지어 황제 니콜라이 1세마저 추파를 던질 정도니 말 다했지요. 아내가 뿌려대는 염문이 매일 같이 귀에 들어오니 작품 활동인들 제대로 됐겠어요? 그러던 1836년 결국 일이 터지고 맙니다. 푸시킨 앞으로 아내가 프랑스인 당테스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익명의 투서가 날아온 거지요. 모욕감을 참을 수 없던 푸시킨은 당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합니다. 그리고 결투 장소로 향하기에 앞서 평소 즐겨 찾던 이 카페를 찾았지요.

     





문인들의 장소, 카페 리테라투르노예

카페 리테라투르노예(Kafe Literaturnoe)는 번역하면 ‘문학 카페’라는 뜻입니다. 19세기 초반 문학계를 주름잡던 문인들이 자주 들리던 곳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군요. 문을 열고 들어가면 1층 창가에 머리가 꼽슬꼽슬한 남자가 앉아 있어요. 바로 푸시킨의 밀랍인형입니다. 탁자에는 결투를 떠나기 전에 마셨던 주스 한잔이 놓여 있어요.                    

  

2층에 올라가면 푸시킨이 앉았던 자리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창턱에 푸시킨과 나탈리야를 닮은 인형들이 놓여 있어요. 푸시킨은 이 자리에 앉아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귀족사회였던 19세기 러시아에서 결투는 생소한 일이 아니었어요. 푸시킨 또한 자신의 작품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결투 장면을 묘사했지요. 주인공 오네긴은 총을 맞고 쓰러진 렌스키의 모습을 보며 이렇게 읊조려요.

     

그는 그린 듯이 누워 있다.
이마에 처참한 평화의 기운이 기이하게 감돈다.
총알은 가슴을 관통했고
상처에서 더운 피가 흘러나왔다.
잠깐 전만 해도
이 심장 속에선 영감과
증오와 희망과 사랑이 뛰고,
생명이 솟구치고 피가 끓었건만
지금은 폐허가 된 집처럼
모든 것이 어둡고 조용하다.1)


명예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다

푸시킨은 자신이 오네긴과 렌스키 중 누가 되리라 예상했을까요? 사실 결투의 결과는 이미 나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푸시킨은 평생 펜대만 굴려온 책상물림인 반면에, 상대는 사격에 익숙한 기병장교였거든요. 결국 오후 5시에 벌어진 결투에서 푸시킨의 붉은 피가 하얀 눈밭을 물들이지요. 복부에 부상을 입고 집으로 옮겨진 푸시킨은 이틀 후인 1월 29일 오후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만 38살의 이른 나이였지요.  

푸시킨이 죽을 줄 알면서도 결투장으로 향한 건 자신과 집안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푸시킨은 6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귀족집안의 후손이었어요. 만 12살의 나이에 귀족학교인 리체이에 입학해 6년간 수학하며 문학적 재능을 뽐냈지요. 당대 최고의 시인인 데르자빈이 소년 푸시킨의 시를 듣고 감탄한 나머지 ‘너는 장래에 위대한 시인이 될 거다.’라고 축복했을 정도지요. 어려서부터 문학적 명성을 날리며 마흔도 되기 전에 러시아의 국민시인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푸시킨의 자존심이 얼마나 강했겠어요? 푸시킨은 나탈리야가 사교계를 들락거리며 염문을 뿌려도 의심하지 않았어요. 자신과의 사이에 네 명의 자식을 둔 아내가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것만으로 자존심이 상했던 겁니다. 그래서 푸시킨은 죽을 걸 알면서도 ‘귀족이자 가장으로서 나의 명예와 아이들에게 물려줄 이름을 지키기 위하여’ 당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했습니다. 어쩌면 결투 장소로 가기 전 카페 리테라투르노예의 창가에 앉아 자신의 시 한 구절을 읊조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군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 인용 출처 : 1) [예브게니 오네긴](열린책들,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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