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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이당주 May 20. 2015

과달루페 성모의 기적
 - 멕시코시티

원주민 앞에 나타난 성모 마리아

1531년 12월 9일, 멕시코시티에 사는 후안 디에고(Juan Diego)는 쌀쌀한 아침 공기를 뚫고 성당으로 향했어요. 몇 년 전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꼬박꼬박 미사를 드려왔거든요. 잰 걸음으로 작은 언덕을 넘고 있는데 여인의 목소리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좀 어리둥절했지만 여인이 부르는데 가만있을 남자는 없잖아요?^^ 그래서 목소리가 들리는 언덕 꼭대기까지 힘껏 달려갔지요. 그랬더니 온몸이 빛으로 둘러싸인 여인이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나는 모든 사람 앞에 나타나 사랑, 연민, 도움, 보호를 내려주는 자애로운 성모다. 
나는 이 땅에 살며 나를 사랑하고, 애원하고, 갈구하고, 믿는 이의 성모다.
 이제 나는 그들의 한탄과 슬픔을 듣고, 
그들이 겪는 모든 고통과 결핍과 불운을 치유하고 덜어줄 것이다.
종교의 꽃 by 호세 포사다, 1895년 이전

알고 보니 눈앞의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였던 겁니다. 그런데 성모의 모습이 좀 이상하더래요. 성당에서 배운 성모의 모습이 아닌 거예요. 검은 머리카락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데다, 원주민 말인 나우아틀 어를 쓴 거죠. 약간 수상했지만 그래도 찬란히 빛나는 모습에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어요. 성모는 주교를 찾아가서 이 언덕 위에 자신을 기리는 성당을 세우라는 명을 전하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주교가 후안의 말을 믿었을까요? 당연히 안 믿었지요. 개종한 지 얼마 안 된 원주민이 찾아와서 오늘 아침에 성모를 만났는데 언덕 위에 성당을 지으라고 했다니 누가 믿겠어요? 후안이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라고 생각한 주교는 성모의 명이라는 증거를 가져오라고 야단을 쳤죠.

 후안은 억울했어요. 성모가 시키는 대로 전언을 했을 뿐인데 거짓말쟁이로 몰렸으니까요. 하는 수 없이 언덕으로 다시 찾아가자 성모가 빨간 장미꽃을 증거로 내놓았어요. 한 겨울에 장미가 핀 것도 신기하지만, 이 장미는 멕시코에서 볼 수 없는 스페인 카스티야 산이었죠. 후안은 겉옷으로 장미꽃을 감싼 후 주교에게 가져갔지요. 그리고 주교 앞에서 겉옷을 펼치자 장미꽃이 쏟아지며 성모의 모습이 새겨진 성화가 나타났어요. 성모의 기적을 눈앞에서 본 주교는 후안의 말을 믿고 언덕 위에 성당을 세웠답니다.



멕시코 가톨릭의 상징, 과달루페 성당

언덕 위에 나타난 성모를 멕시코에서는 ‘과달루페(Guadalupe) 성모’라고 부릅니다. 성모의 명에 따라 1531년부터 짓기 시작한 성당은 약 180년 만인 1709년에 완공되었어요. 이후 ‘과달루페 성당’이라 불리며 멕시코 가톨릭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지요. 과달루페 성모의 모습이 새겨진 기적의 성화가 걸려 있으니 얼마나 많은 신도들이 찾았겠어요? 지금도 매년 수백만 명의 참배객이 찾는 가톨릭의 중요한 성지로서, 특히 과달루페 성모의 축일인 12월 9일에는 성모에게 경배를 드리기 위해 몰려드는 신자들로 언덕 아래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지요.


     

언덕 위에 오르면 광장 맞은편에 과달루페 성당이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당을 앞이 아니라 옆에서 보면 앞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어요. 호수를 메워 만든 멕시코의 약한 지반 탓이지요. 신도들의 안전이 위협받을 정도로 성당이 기울자 성화를 모실 새로운 성당이 필요해졌어요. 그래서 옛 성당 왼쪽에 새로운 과달루페 성당을 건립했습니다. 멕시코의 유명 건축가 페드로 바스케스의 작품으로 1974년에 착공해 1976년에 완공했어요. 원형 모양의 성당에는 한번에 1만 명의 신도를 수용하며, 제단 위에는 과달루페 성모의 성화가 걸려 있지요.


     

과달루페 성모는 조작되었다?

과달루페 성모가 발현한 언덕은 예로부터 테페약(Tepeyac)이라 불렸습니다. 원래는 멕시코의 어머니 여신인 토난친(Tonantzin)의 성소가 있던 곳이지요. 사실 멕시코를 정복한 스페인의 수도사들은 가톨릭을 선교하는 데 애를 먹었어요. 가톨릭의 성인이 다들 하얀 피부를 지닌 백인종이다 보니 원주민 입장에서는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검은 피부를 지닌 과달루페 성모가 출현한 거예요. 그것도 멕시코 전통의 토난친 여신이 머무는 곳에서 말이지요. 이에 원주민들은 과달루페 성모를 토난친 여신의 화신으로 받아들였어요. 이후 과달루페 성모에게 감회된 원주민들의 개종 러쉬가 이어졌습니다.  발현이 있은 지 7년 만에 무려 800만 명의 원주민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니 실로 엄청난 위력이었지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스페인에도 과달루페 성모가 있다는 점이에요. 멕시코보다 약 2백년 앞선 1322년에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의 출생지인 엑스트레마두라 지방에 출현했지요. 원래 ‘과달루페’라는 이름은 ‘검은 바닥을 흐르는 강’이란 뜻의 아랍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스페인의 과달루페 성모도 거무스름한 피부를 지닌 ‘검은 성모(Black Madonna)’이지요. 스페인에서는 이슬람교도를 몰아내는 국토회복운동의 정신적 지주였고, 멕시코에서는 원주민을 무찌르는 원정대의 수호자였습니다. 이렇다보니 스페인이 멕시코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종교적 목적을 가지고 성모 발현을 조작했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어요. 가톨릭 선교가 지지부진하자 토난친 여신과 비슷한 과달루페 성모를 이용해 원주민을 속였다는 거지요.

과달루페 성모의 성화

하지만 현재의 멕시코인에게 과달루페 성모의 조작 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발현 당시부터 원주민들은 성모를 ‘과달루페 토난친’이라 부르며 토착 여신과 동일시했어요. 성모에 대한 예배도 기독교식이 아니라 토속신앙의 의식으로 치렀고요. 어쩌면 원주민들은 전통적인 여신의 가호를 받는 동시에 자신들을 핍박하는 이방인의 여신으로부터도 보호를 받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여신의 이름이 대수겠어요? 중요한 것은 어머니처럼 자애로운 여신이 불쌍한 인간들을 돌봐준다는 점 아니겠어요?


과달루페 성모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는

멕시코, 인종과 문화의 용광로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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