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행 중 계기판에 공기압이 낮다는 경고등이 떴다. 가까운 마을 골목 안에 급히 차를 세운 뒤 타이어를 확인해보니 앞바퀴에 작은 나사못 하나가 박혀 있었다.
"10분이면 수리가 가능합니다."
여행의 흐름을 끊어버린 작은 녀석이 무척 야속했지만, 현장에 출동한 기사님의 호언장담을 믿어보기로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주차한 곳 주변으로 노란 유채꽃과 청보리들이 바람에 살랑이고 있었고, 저 멀리 오래된 낮은 지붕 사이로 푸르게 빛나는 바다의 물빛이 시선을 빼앗았다. 거짓말처럼 10분 안에 수리를 마친 기사님은 자리를 떠났지만, 이곳에 남아 마을을 더 둘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에 홀린 듯 그렇게 북촌리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북촌리는 여행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마을은 아니다. 아름다운 바다로 유명한 함덕리와 김녕리 사이에 있어 무심코 그냥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그 때문인지 상업자본의 때가 덜 묻어 골목 속에 느껴지는 투박함이 사랑스러웠다. 이곳의 바다도 환상적인 물빛을 보여주는데, 포구 가까이에 떠 있는 작은 섬 다려도가 풍경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다.
사실 북촌리는 제주 4·3의 상흔이 깊은 마을 중 하나다. 1948년 12월 16일 군경에 의해 24명의 주민들이 희생된 것을 시작으로 이곳에서만 5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마을 인구가 약 1500명이었다고 하니, 마을 사람 셋 중 하나는 죽음을 피해 가기 어려웠던 셈이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사람들은 강요된 침묵 속에 가족을 잃은 슬픔을 가슴에 묻은 채 살아야 했다.
제주 4·3의 참상은 1978년에 발표된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으로 인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작가는 학살현장에서 살아남은 순이삼촌의 삶이 어떻게 황폐화되어 가는가를 보여줌으로써, 4·3의 참혹상을 고발함과 동시에 오랜 세월 묻혀 있던 사건의 진실을 공론화시키는 데에 큰 공헌을 했다. 마을 어귀에 건립된 너븐숭이 4·3 기념관에서는 순이 삼촌 문학비를 찾아볼 수 있다.
밭담 사이로 작게 솟은 언덕 위에 올랐다. 그곳에는 멋진 수형의 팽나무 여러 그루가 자라고 있었는데, 뻗어 나온 나뭇가지가 제주도의 강한 바람 덕분에 휘어지고 뒤틀려 묘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마침 3월 하순이라 가지마다 연둣빛 어린잎이 가득 돋아났다. 그 모습이 아픔의 역사를 딛고 다시 아름다운 일상을 꽃피우고 있는 마을의 모습과 닮아 뭉클했다. 마을을 떠나며 짧은 기도를 했다. 더 이상 이곳에 아픔의 역사가 쓰이지 않기를.